오랜만에 수원에 다녀왔습니다.
엄마 생일이기도 하고, 버릴 가구들이 있다고 해서 오랜만에 형제들이 다 모였습니다. 외식을 하고 집에 들어가면서 케익, 소화제, 과일을 사려고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낯설어진 풍경에 조금 놀랐습니다. 예전의 허름한 건물들과 주택들은 모두 사라지고 신도시의 아파트처럼 신축 아파트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동네는 제가 수십년 동안 친구들과 놀고 울고 웃고 넘어지던 동네였습니다.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여러가지 추억과 기억들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그런 동네. 그런데 이번에는 케일을 사고,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또 마트에서 과일을 사는데 전혀 낯선 도시에 들어선 느낌이었고 이전의 기억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기억은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역시도 기억이나 의식은 머릿 속에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체험들은 기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기억이 책 속의 정보 혹은 컴퓨터의 저장정보를 찾아내서 읽어내는 것이라면 외부의 자극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 생활에서 문득문득 솟아오르는 기억들은 우연하게 맡게 된 향기, 촉감, 공간의 구조와 색감같은 외부적 환경과 연결될 때가 대부분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학창시절의 유행했던 단어나 노래가 기억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이런 외부 환경들은 단순히 트리거 역활을 하는 자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기억은 머릿 속에 있는 정보가 됩니다. 컴퓨터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명령어를 치듯이 우리의 기억 역시 명령어가 필요할 뿐이다. 외부 환경 혹은 자극이란 단순한 이런 명령어일 뿐이다. 정말 그럴까?
기억의 본질이 내 머리, 뇌 속의 뉴런들의 전기화학적 반응이라기보다는 기억 역시 배치 속에서 구성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기억은 머릿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니던 골목길과 담벼락의 무늬, 매일 들락날락 거렸던 오래된 문방구, 친구의 목소리와 유행가, 자주 먹던 떡볶이와 오뎅이 조금씩 나눠갖고 있는 것같습니다. 마치 오래전 다니던 은하수문방구와 수천번 오르락내리락 했을 태장면 고개의 떡방앗간과 마주치는 순간 그 풍경이 가지고 있던 기억의 조각과 내 신체의 조각들이 결합되면서 관념을 구성되는 거죠. 이렇게 보면 기억은 내 것만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기에 이제 어릴 적 기억은 전혀 다르게 구성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시절의 그 기억들은 그 공간과 풍경, 향기와 소리들로 구성된 것이기에, 지금부터 머릿 속에 떠올리는 기억이란 거의 완전한 상상에 가깝게 될 것입니다.
기억이 내 신체의 배치, 그리고 외부 환경, 자극들의 배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런 생각을 좀 더 밀고나가보면 당연히 의식이나 자아의 모습 역시 나에게만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본질적 자아의 모습은 사실 허상에 가깝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지나온 세계의 배치 속에서 구성된 기억들, 관념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기억이 배치이고, 의식 역시 이런 배치 속에 형성된 것이라고 하면 나는 '나'이기도 하지만 나는 또한 아인슈타인, 이순신, 정약용, 김대중, 한니발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세계의 모든 인물이었다는 니체의 말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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