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프루스트 읽기

귀족과 왕족이라는 다른 종의 세계에 입문하다

by 홍차영차 2022. 7. 19.

귀족과 왕족이라는 다른 동물 종의 세계에 입문하다

 

 

발베크에서 맺어진 빌파리지 부인과의 인연을 통해서 마르셀은 드디어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살롱에 입성한다. 이제 진짜 게르망트다.

마르셀에게 '게르망트'는 단순한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스완네 집쪽으로'에서 마르셀 가족이 주로 산책 다녔던 메제글리즈쪽과는 전혀 다른 게르망트쪽의 세계! 사랑하지만 알 수 없는 연인의 미소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세계들이 상상되는 것처럼, 마르셀에게 게르망트는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현실의 법칙과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세계, 마법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르에서 봤던 생루의 차가운 모습과 '300만 프랑의 금덩이'로 만들어진 것처럼 차갑게 보였던 게르망트 공작을 통해서 상상이 조금 깨지긴 했지만, 너무나 오랜동안 동경해왔기에 마르셀의 육체와 정신을 가득 채운 상상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마르셀은 그들에게서 여전히 고귀함과 우아함의 아우라를 발견한다.

 

 

드디어 수수께끼의 단서가 될 만한 단어가 공작의 입에서 나왔다. "부인께서는 자네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네."  ...... 여기 있는 부인과 뤽상부르 대공 부인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었지만,  부인을 내게 소개하는 공작의 언어에서 나는 그 동물의 종을 알아보았다. 부인은 왕족이었다. 부인은 내 가족과 나 자신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가장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고 세상에서 가장 큰 부를 소유한 부인은 조물주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아무리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태생이라 할지라도 이웃을 멸시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다. 사실 부인의 미소만 보고도 그 사실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나는 뤽상부르 대공 부인이 바닷가에서, 마치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에 있는 사슴에게 주듯이,  할머니에게 주려고 호밀 빵 사는 모습을 이미 보지 않았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6권 게르망트쪽 - 188쪽

 

 

하지만 부르주아 사회에 살고 있는 마르셀은 아직은 귀족들과 왕족들이 보여주는 기호들에 익숙하지 않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이나 파름 대공 부인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들은 마르셀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해석되지 않는 이상한 '기호'로만 보일 뿐이다. 마르셀은 이전에 마주쳤던 귀족들의 행동들을 떠올리면서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살롱을 통해서 이상하게만 보였던 행동과 말들을 해석하게 된다.

귀족들의 사교계는 부르주아 세계와는 전혀 다른 체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귀족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고, 어떤 룰북을 외우는 것은 의미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행동과 말들은 '전체의 일부이면서, 그것 자체가 전체를 표현'하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공 부인은 마르셀과 그의 가족을 만난 적이 전~혀 없다. 마르셀이 누군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족으로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는 하찮아 보이는 개미 한마리도 다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자신을 알아본듯한 파름 대공 부인의 얼굴모습이 보여주는 기호다. 게르망트 공작이 엘스티르의 그림을 보느라고 거의 한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마르셀을 데리고 곧바로 파름 대공 부인에게 데리고 간 이유이기도 하다. 파름 대공 부인의 이 이상한 행동은 그 행동 자체로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다. 귀족/왕족 사교계 전체의 기호체계 속에서만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여인들은 서 있는 대공 부인 앞에 절했고, 그렇지만 축 늘어진 아름다운 손에다 입술을 대고 키스하려고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대공 부인은 자신이 잘 아는 이런 의전에, 그렇지만 매번 놀란다는 듯, 무릎 꿇은 이들을 강제로 비할 데 없이 우아하고도 부드러운 몸짓으로 일어나게 하면서 그들의 뺨에 키스했다. 사람들은 이런 우아함과 부드러움은 방금 들어온 여인이 얼마나 겸손하게 무릎을 꿇느냐에 달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또 평등 사회에서 예절은 곧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새로운 사회에서 예절이 사라질지 어떻지는 확실치 않으며, 또 우리는 이따금 예절의 현 상태가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고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 요컨대 평등 사회에서 예절은 철도의 발달과 비행기의 군사적 이용보다 더 큰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예절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이 불행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끝으로 사회란 사실상 민주화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은밀한 방식으로 서열화되어 가는 게 아닐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6권 게르망트쪽 - 238~239쪽

 

 

게르망트 살롱은 하나의 세계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바라볼 때는 낯설고, 이상하며, 이해할 수 없는 말들과 행동들로 보인다. 아는 사람을 안다고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한 세계! 무릎을 꿇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무릎을 꿇는 행동을 해야 이뤄지는 이상한 의례와 절차들! 하지만 여기에도 오랜 세월을 통해 형성된 나름의 기호들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기호들을 진리라고 믿는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만이 유일하게 합리적이라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게르망트의 살롱과 다른 베르뒤랭(부르주아) 클럽도 존재하고, 또 그들과는 전혀 다른 무수한 세계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힘이다. 아직은 낯설고 서툴지만 마르셀은 게르망트라는 낯선 세계와 마주치면서 자신의 관점을 갖는 힘을 기르고있는 것 같다. 아마 되찾은 시간에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런 해석의 힘, 글쓰기의 힘을 보여주는 마르셀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