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동안 프루스트를 함께 읽고 있는 논병아리샘이 추천했던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었습니다.
'열린책들' 번역으로 봤는데, 줄과 줄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아서 이미지상으로는 그리 읽고 싶지 않았다는. 하지만 주인공 줄리앵 소렐이 나오기 시작하는 부분부터는 아주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줄리앙 소렐이 목수의 아들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뛰어난 지성과 감각으로 당시 최고의 귀족이던 라몰 후작의 비서가 되고 귀족의 이름을 받기까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1830년대 작품인데 19세기 후반, 20세기에 들어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 이해되었습니다. 혁명과 반혁명이 여전히 진행되는 불안한 시기였는데, 줄리앙은 지금의 현대적 인물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다스리면서도 야망을 가지고 점점 더 높은 위치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따져보면, 스탕달의 <적과 흑>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거의 100년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줄리앙은 자신의 감정과 분리된 속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 간격은 크지 않습니다. 겨우 1mm의 간격으로 정신과 육체를 유지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자신은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고 여기지만, 집에 있을 때 혹은 신학교에 갔을 때 그리고 라몰 후작의 비서가 되었을 때도 주변의 모든 사람이 줄리앙이 품고 있는 반항적이고 꺽을 수 없을 것 같은 무언가를 느꼈으니까요. 자신도 모르게 삐져 나오는 분노와 열정 자신도 놀랄 때가 많았으니까요.
사회 정치적으로도 줄리앙의 시대는 마르셀의 시기와 아주 달랐습니다. 줄리앙은 나폴레옹의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자신도 전투에서 공을 세워 20대에 사령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왕정으로 돌아와 있지만, 귀족들은 언제 다시 평민/부르주아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의 목이 단두대에 걸릴 것을 염려하고 있었죠. 귀족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완전히 힘을 잃어버렸던 프루스트의 19세기 말/20세기 초와의 상황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 프루스트가 태어난 것이 1789 프랑스 대혁명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1871년 파리 꼬뮌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줄리앙 소렐이 드러내는 감정과 속마음에는 간극이 있지만, 그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프루스트가 보여주는 마르셀은 아주 독특한 위치에 있는 듯 합니다. 마르셀은 처음부터 사랑과 예술, 게르망트 귀족 사회와 부르주아 사회가 발산하는 수많은 잉여와 기호들에 아주 민감하게 감각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런 기호들의 의미를 해석하는데는 익숙하지 않았죠. 그래서 질베르트와 알베르틴을 비롯한 수많은 소녀들, 그리고 게르망트 귀족 사회가 보여주는 기호들에 당황하고 많은 오해와 상상들을 하게 됩니다. '되찾은 시간'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마르셀은 이런 속마음을 가질수밖에 없는 딜레마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감정(신체)와 속마음의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프루스트가 내린 결론은 학문적/과학적/이성적 접근이 아닌 예술적 삶의 방식! 얼른 얼른 마지막 '되찾은 시간'을 읽고 싶네요. ㅎㅎㅎ
<적과 흑>은 상/하권으로 되어 있는데, 하권으로 가면서 가속된 것처럼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조금은 충격을 주면서 끝납니다. 마지막까지 다 읽고나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구술문자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으로, 자아/정신의 발견이라는 관점에서 100년 정도의 간격을 가진 소설들을 읽어보면 아주 흥미로울 것 같다는.
좋아하고 읽어보고 싶은 소설로 적어봅니다.
지금은 1800년 전후의 소설을 집중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보르헤스 <알렙>(1949)
무질 <특성 없는 남자> (1930)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20)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1876) <허클베리핀의 모험> (1885)
스탕달 <적과 흑>(1830)
괴테 <파우스트> (1800)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1719)
조너던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1726)
셰익스피어 <햄릿><리어왕> <오델로> <맥베스> (1600년전후)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1605)
단테 <신곡>(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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