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알베르 카뮈
그리스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모습을 한 사람들을 바바로스barbaros라고 불렀다. 이후 바바로스는 야만적인 민족(사람)을 뜻하게 된다. 우리는 '낯설은 것', '이질적인 것'을 중립적으로 보지 못한다. 어떤 존재도 자신의 방식을 확장하거나 유지하려 하지 일부러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삶의 방식 - 외적인 모습이나 절차, 관례, 사유 방식과 다른 것들을 호기심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으로 바라본다. 이제까지 행해왔던 방식과 다른 사유와 행동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요구하고 전면적인 재배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떤 생명체도 이전의 존재방식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살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제 담근 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기 때문이다.
<페스트>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방인>을 다시 읽었다. 부정의 방식이라는 <이방인>이 긍정의 방식이라는 <페스트>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1940년대 이방인으로 스스로를 바라봤던 알베르 카뮈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타자들을 이방인으로 보는 시대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즉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들 누구나 매일 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방인> 미국판 서문 中)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서로 소통할 능력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거짓말을 통해서 삶을 간단히 하기를 거부하는 뫼르소를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도 뫼르소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뱉고 싶어하지 않을까. 엄마가 죽었지만 담배를 피고 싶을 수 있고, 밀크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또한 감정의 표현이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눈물로, 흐느낌으로만 방출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의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자신의 정체성을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나의 행위가 정말 하나의 목표와 방향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사실 어떤 행동도 세상의 모든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정확하게 묘사될 수 없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함으로 놓여져 있는 것을 참을 수 없기에, 거짓말을 통해서 명확하게 하는 것이 삶을 더 편하고 간단하게 살아갈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삶과 인간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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