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훌륭하다”와 니체
니체와 음악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니체가 음악을 사랑했다는 말로는 충분치 못하다. 니체는 꽤 많은 클래식 음악을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학 작품을 음악적으로 썼다. 아니 니체는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문자를 가지고 음악을 연주하려고 시도했다. 니체에게 음악만이 유일한 소통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고 말한 것 역시 니체가 이해한 음악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음악은 신체적이다. 뭔가를 머리로 생각해서 이해하지 않는다. 음악의 소통은 기본적으로 신체 감각을 통해서 이뤄진다. 신나는 락 음악의 베이스 소리는 곧바로 심장으로 통하고, 모든 신체를 울리고 격정적으로 하나를 이룬다. 반대로 한 음씩 내려가는 피아노 소리를 듣노라면 누구라도 점점 슬퍼지고, 불협화음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불안함을 느낀다.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똑같은 이유에서 음악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니체는 도덕, 종교, 규범, 전통, 관습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통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문자와 단어에 갇히지 않은 존재 그 자체로 말하고 소통하기. 음악이야말로 니체에게 최고이자 유일한 소통인 이유이다.
소통이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의 교환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우리는 문장의 뜻을 이해했다는 것으로서 ‘소통’이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다. 언어 만능주의 시대! 우리는 서로에게 자주 이렇게 말한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하지만 들어보면 아니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우리는 평소에 ‘언어’가 아닌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엄청난 표현을 쏟어내고 있다. 사실 언어는 서로를 이해하는 수많은 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다.
<개는 훌륭하다>에 나오는 사나운(?) 개들과 훈련사 강형욱을 보면서 니체가 떠올랐다. 강형욱의 이야기들은 동물들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인간의 동물적 면모 혹은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도 잘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나운 개에게 ‘앉아’라는 말을 할 때, 그 개에게 중요한 것은 그 단어 자체가 아니다. 개에게는 소리 자체가 주는 세밀한 강도차이가 중요할 것이다. (들뢰즈라면 분명 소리의 강밀도라도 말하지 않았을까. ^^) ‘앉아’나 ‘sit down’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힘의 의지’가 어떠한가가 중요하다. 명확한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짧고 굵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왜 우리는 사람을 듣지 않고’ 언어/문자만을 들으려고 하지? 그 사람이 무수하게 방사하고 있는 비언어적 언어들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말과 문자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작은 제스추어, 행동, 몸짓, 말의 떨림, 눈빛과 체온, 숨소리까지.
이렇게 말하면 뭔가 전문적이고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비언어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다. 비언어적 언어의 표현은 누구나 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데에는 관심을 쏟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소통과 이해는 오로지 ‘언어’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꾸 “말을 해야 알지.”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게 된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존재 가운데 드러나는 존재 - 모리스 블랑쇼 (0) | 2020.08.13 |
---|---|
바타유의 <불가능> 읽기 (0) | 2020.08.02 |
혹시 우리의 공부가 반지성적으로 가고 있는건 아닌지 (0) | 2019.01.03 |
다른 40대의 탄생? (0) | 2018.12.17 |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기 (0) | 2018.1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