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기

by 홍차영차 2018. 11. 28.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기

-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6~10장 -








최후의 인간들의 목적지인 ‘이우이 마라 에인ywy mara ey’에 사는 존재들은 모두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에 의해 명명될 수 없는 평등한 자들인 신-인간이자 인간-신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p216)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스스로를 최후의 인간이라고 여기면서 ‘하나’로 오염된 대지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찾으려고 했던 과라니족의 신-인간이자 인간-신은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했던 곰이자 인간, 반은 곰이고 반은 인간인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애매하게 여겨졌던 대칭성 사고라는 것도 여기까지 살펴보면 조금 더 구체성을 띠게 된다. 곰이 어떻게 사람이 되고, 가자미와 관계맺는다는 것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게도 ‘분리’가 있다. 세계 밖에 존재해야 하는 위험한 힘을 소유한 샤먼과 재규어는 사회와 분리되어야 하고, ‘권력과 말의 권리’를 분리하기 위해 말은 추장의 강제적 의무가 되어야 했고 인디언들은 추장의 말을 듣지 않는 척해야 했다. 물론, 우리 사회에도 분리가 있다. 아니 우리 근대 사회란 계속된 분리와 해체를 원동력 삼아 건설된 사회라고 해야할 것이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 청소년과 아이, 도덕과 경제, 종교와 법, 의료와 마법……. 우리의 의식과 행동은 점점 더 세분화된 분리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같은 분리이지만, 원시사회가 추구했던 분리와 근대사회가 추구했던 분리는 근원에서부터 다른 것 같다. 남아메리카의 주민들의 이러한 분리는 전체가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것에 대한 반대였던 것 같다. 그들은 분리를 통해서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 속에서 서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던 것이 아닐까. 구아야키족의 남녀 역할 분담과 차이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들은 (남성이라는) 하나의 계층(?)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고, 신체적으로 남자일지라도 그 사람의 특성이 여성적이라면 이 또한 무시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았다.

무수히 다양한 잔인한 고문으로 행해졌다는 남아메리카의 다양한 입문 의례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 남아메리카의 부족들은 왜 하나의 입문 의례로 단일화 되지 않았을까? 서로 인접한 부족끼리는 다른 부족의 의례에 대해 알았을 것이고, 동일성(제도화)의 유혹이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서로 다른 입문 의례를 만들면서 집단으로서 다른 집단과의 차이형성에 중요성을 두었던 것 같다. 신화와 연계된 의례를 행하면서 내가 다른 부족이 아닌 바로 이 부족이라는 의식의 형성, 그들은 입문 의례를 통해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망각에 대한 장애물’로서의 신체의 흔적을 이런 의미에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반면에 근대 사회에서 행해진 계속된 분리는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포획한 것 같다. 의례의 본질은 사라지고 오로지 표피에만 남아있는 방식으로. 현재 우리 사회의 유일한 입문 의례는 대학입학시험인 수능이 아닐까? 수능이 끝나는 날, 우리는 입문자들이 시험을 잘 보았든 못 보았든 상관없이 의례(?)를 마쳤다는 의미로 그들을 안아주고, 사회적으로도 얼마동안 그들에게 나름의 혜택을 준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수능시험과 대학은 우리들에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그 어떤 힘도 되지 못한다. 너무나 보편화되었고, 실제 삶과 괴리된 방식으로 시험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체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수능 혹은 시험을 보았다는 것은 서로를 같은 부족으로 인식시키기보다 서로를 위계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이 서로 서로를 같은 ‘부족’으로 인할 수 있는 행동이란 순간 순간 바뀌는 유행을 좇으면서 우리가 하나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것밖에 없게 되었다.

모순矛盾, 아포리아aporia, 딜레마dilemma. 지금-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세분화된 분리가 아니라 서로가 분리해낼 수 없음을 인정해야하는 이러한 단어들이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에 대한 명쾌한 정답이 아니라 답할 수 없는 질문이고,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태초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말, 결코 함부로 헛되이 입밖에 낼 수 없는 신성한 말이 아닐까.

분명 지금은 수능 시험을 보았다고,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통과의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현실에 맞는 누구나 평등하게 겪어야하는 새로운 ‘통과 의례’이다. 하지만 이 통과의례는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통일된 방식이 아니라 그 지역, 혹은 공동체에 독특한 다양한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봤던, 클라이스트가 전하고자 했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란 이처럼 점점 더 똑같아지는 동일성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우리와 그들간의 차이를 더 분명하게 하고 그 차이를 서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p232)



2018. 11.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