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우리의 공부가 반지성적으로 가고 있는건 아닌지
<반지성주의를 말한다>, 이 책은 우치다 타츠루가 사업가, 철학자, 정치학자, 작가, 영화작가, 의사, 무도가와 같은 다양한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본의 반지성주의'란 무엇인지를 말해달라는 기획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면서 원고를 청탁했다.
"현대 일본의 반지성주의는 미국의 그것과는 꽤 이질적인 듯하지만,언론, 비지니스, 대학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의 근간에 반지성주의, 반교양주의가 깊이 침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사실입니다.
반지성주의를 초래한 역사적 요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래서인지 책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쓴 논지와 방향은 전혀 달랐다.하지만 이런 부분은 단점이라기 보다는 반지성주의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우선 우치다 타츠루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그의 말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는 단순히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반지성주의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흔히 전문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무지란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지식의 포화 상태로 인해 미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롤랑 바르트)를 말하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지성을 '집단적인 현상'으로 본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지성적이라는 것은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의 유무가 아니라 지금까지 생각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싶어지는 형태로 타자들에게 미치는 힘이라는 것. 다른 식으로 말해서 개인적인 지적 능력이 높은 듯하지만, 그 사람이 있음으로써 주의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노동 의욕이 저하되고, 아무도 창의적인 제안을 하지 않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를 반지성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 부분에서 마이 찔렸다. T.T)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는 반지성주의를 '지적인 삶 및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혹'이며, '그러한 삶의 가치를 늘 극소화하려는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핵심은 반지성주의는 수동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적극적인 공격의 원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 지성의 부재 그러니까 '비지성적인'것과는 다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지성의 작용에 대한 모멸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서 2장에서 시라이 사토시(사회학자)는 '반지성주의'가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대중의 항상적인 에토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동등한 권리를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의 불평등 --> '평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지적인 일 전반은 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발상! 그가 보기에 대중민주주의가 진화할수록 반지성주의의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중대한 난제를 껴안고 있다.
시라이 사토시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문맥으로 '중산층사회의 붕괴'되었고,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고 있는데, 여기서 지배층들이 B층, 하류이라 불리는 "구조개혁에 긍정적이고 IQ가 낮으면서 매스컴에 휘둘리기 쉽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대로 받아들여 찬성을 외치는 어리석고 지성을 결여한 사람들"에 타겟팅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1, 2장이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반지성주의를 재정의하고, 분석하고 있다면, 3,4장에서 작가라고 불리 사람들이 바라보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마디로 작가들은 반지성주의를 신체성과 관련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지성이란 생각하기 전에 존재하는 것이고, 여성적 시선으로 위가 아닌 아래로의 시선, 즉 일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시선으로 정의한다. 2장에 인용되는 쓰루미 슌스케의 이야기가 정확히 이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쓰루미 슌스케의 아들이 물었다.
"아빠, 자살해도 되는거야?
"응, 자살해도 돼. 단 두 가지 경우에만, 전쟁에 끌려가서 적군을 죽이라고 명령받았을 때 적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자살해도 돼. 또, 너는 남자니가 여자를 강간하고 싶어지면 그 전에 목을 매고 죽는 게 좋아."
쓰루미 슌스케는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딘가에 있을 맞는 답'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답은 쓰루미 슌스케씨 '안'에, 더욱 정확히 말하면 쓰루미 슌스케 자체에 있었다. 외부에서 날아 들어오는 어떤 질문도 그 자신을, '심신'을 통과한다. 그래서 그는 빠르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신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고, 자기가 누구이고,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언제나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P.S.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세미나 후반부에서는 문탁과 우리의 공부, 회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파지스쿨 간담회를 거치면서 어떤 면에서 우리가 '지성적'이지 못했는지, 어떻게 하면 지성적인 방식의 공부, 회의 , 운영, 대화가 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이야기 나눴다. 특히 어렵다고 생각한 것은 칼 포퍼가 이야기한 "우호적-적대적 협동"이었다.
포퍼에게 과학적 객관성 혹은 지성이란 한 사람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고 유래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우호적-적대적 협동'에서 유래한다는데, "적대적 협동"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상상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와 완전히 다른 노선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더 쉽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차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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