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불가능성으로서의 밤
: 모리스 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하지만, 존재 대신에,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듯이 존재자 대신에, 존재에 관한 것만 남았으며, 자신이 생겨나게 해야했던 의미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그 어느 것에 다가갈 수도 그 어느 것을 살아갈 수도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43쪽)
바타유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말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는 너무 거대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지는 죽음, 무(無), 모호함, 부재/현재, 의미/무의미라는 단어 앞에서 어떤 태도와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당황스러웠다. 신기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싫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처음 읽을 때 ‘이해 불가능성’은 모리스 블랑쇼 읽기의 장애였지만 또한 이는 미지의 것에 대한 욕망으로 작동했으니까.
책장을 살펴보니 모리스 블랑쇼의 책 3권이나 꽂혀있다. <문학의 공간>, <카오스의 글쓰기>, <도래할 책>. 왜 샀을까? 블랑쇼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제목과 외모에 매혹되어 책을 구매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죽은 블랑쇼만을 바라봤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런 제목이지 않았다면, 모리스 블랑쇼라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만남 역시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블랑쇼 & 레비나스
철학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삶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라면, 문학은 ‘삶 그 자체’를 보여주려는 시도인 것 같다. 하지만 블랑쇼가 말했듯이 씌어진 것은 항상 ‘그것’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현실의 삶을 그려내려고 해도 삶과 문학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문학의 독특성이 위치한다. 조지 오웰의 <1984>는 분명 동물들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 소설에서 현실보다 적나라한 현실을 맞이한다. 또한 <82년생 김지영>에서 나온 익명의 이름들은 책을 읽어갈수록 익명이 아닌 구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경험한다.
나의 말이 존재를 그 비존재 가운데 드러낸다면, 나의 말은 이러한 드러남에 있어서 말하는 자의 비존재로부터, 말하는 자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그러한 능력으로부터 말하게 된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진정한 언어가 시작되기 위해, 이 언어를 짊어지고 갈 삶은 그 자체의 무에 대한 경험을 해야 했고, 삶은 “그 깊이에서 전율해야 했으며, 삶에 있어서 고정되고 안정된 모든 것은 흔들려야만 했다.” (45쪽)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반복적으로 죽음, 부재, 모호함을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고양이라고 부르는 순간 “존재하는 그대로의 고양이”는 소멸되고 그 이름만이 남는다. 비실존을 통해서 실존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말과 언어가 너무나 익숙하고 그것이 대상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친구의 이름을 부르고 그와 밥을 먹고 함께 오랜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깔깔거리고 웃을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아무것이 아닐 수 있다. 아니 여기에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야 한다. 대화하고 말로 표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상 죽어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고민이 여기에 있고, 삶의 고민이 여기서 또렷이 나타난다.
주체가 아닌 비주체, 의미가 아닌 무의미,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삶을 좀 더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한다는 말! 나를 ‘홍차’라고 불렀을 때 “인간이 아닌 이 사람”은 사라진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와 만나고 내 존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홍차’라는 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존재하는 그 자체로의 홍차는 ‘홍차’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는다. 즉, 홍차라는 이름, 언어, 말의 무의미성에 대한 깊은 경험이 필요하다. 이 경험은 “삶에 있어서 고정되고 안전된 모든 것이 흔들리는” 그런 깊이의 전율이어야 한다.
문학은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사물들의 현전이요, 세계가 사라지고 난 이후의 사물들의 투지이며, 모두가 지워지고도 남아 있는 것의 완강함이요, 아무것도 없을 때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오는 얼떨떨함이다. (50쪽)
낮을 부정하면서, 문학은 숙명으로서의 낮은 다시 세운다. 밤을 긍정하면서, 문학은 밤의 불가능성으로서의 밤을 찾는다. 이것이 문학의 발견이다. (52쪽)
낮(말, 이름)을 부정하지만 낮이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을 낮으로 만들려는 시도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을 말한다. 24간이 모두 낮이 되었음에 기뻐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밤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기술이고, 능력이다. 밤에 작은 등불이나 촛불을 켜는 것은 밤을 더 밤답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해할 수 없음을 그대로 놓고, 이해불가능성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것에 해답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답이 없는 문제를 붙들고 끊임없이 끙끙거리면서 뭔가를 끄적거리기가 필요하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술 시대의 '인간의 조건' (0) | 2020.11.05 |
---|---|
비인칭의 문학 (3) | 2020.09.03 |
바타유의 <불가능> 읽기 (0) | 2020.08.02 |
"개는 훌륭하다"와 니체 (0) | 2020.04.05 |
혹시 우리의 공부가 반지성적으로 가고 있는건 아닌지 (0) | 2019.01.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