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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우리 모두는 자신의 입장에서 말한다

by 홍차영차 2018. 11. 20.

다른 입장立場

국가 없는 사회, 무문자 사회, 생계경제 사회…… 얼핏 들으면 그저 객관적 사회현상을 묘사한 단어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1장에서 클라스트르가 말한 것처럼 이 단어들은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었는지 혹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따라 읽는 사람들에게 아주 ‘다른 뉘앙스’를 줄 수 있다. 모든 사회의 목적은 국가 형성이어야 한다든지, 문자 없는 사회는 미개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거나, 잉여를 생산하지 못한 것은 기술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전혀 다른 뉘앙스가 전달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객관적 사실 혹은 중립적 의견이라 표식은 오히려 말하는 스스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말하는 음흉한 테크닉일 뿐이다.

한 가지 더. 어떤 사회학, 인류학, 역사 서적을 읽든지 기억할 점이 있다. 그 어떤 시대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시대가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하는 시기라고 생각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를 살아왔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를 중심으로, 자신의 살아가는 시대를 최선으로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서구 유럽인들이 처음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만나서 말할 수 있던 이야기들은 그들의 관점과 입장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폭력과 강제로 형성된 국가 속에서 자라난 그들에게 국가 없는 사회, 강제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더 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15세기의 대항해 시대를 열어젖힌 유럽인들의 눈에 한낮에 놀고 있는 남자, 개발되지 않은 자원을 방치한다는 것은 경제적 시각에서는 물론이고 도덕적 시각에서도 용납하지 못할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입장이란 결국 단선적 발전과 진화생물학적 담론으로 무장된 언어도단言語道斷일 뿐이다. 남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세워서 살아왔다고 봐야한다. 바로 여기서 인류학이 갖는 의미가 도드라진다. 인류학의 의미는 누가 더 발전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함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


개념의 발명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넓은 아량과 성찰을 통해서 덕. -.-; 그렇다면 덕과 성찰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바로 개념의 발명을 통해서가 아닐까. ^^

마르셀 모스가 말한 “총체적 사회적 사실”로서 증여가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멜라네시아 원주민이 과연 ‘상품’의 원리가 삶의 곳곳에서 적용되고 있는 현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공동체 가운데 굶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매일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종일 일하고 있는 (임금노동의 개념을 가진) 사람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현대를 해석하는 방식은 오로지 그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을 바탕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상품’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증여’개념의 확장일까라는 해석정도가 아닐까.

철학이란 개념의 발명이라고 말한 들뢰즈를 언급하지 않더라고, 우리가 자민족중심주의, 가족중심주의, 국가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다름을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의 발명일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 당장 가족, 일, 카카오톡이라는 개념을 잃어버린다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질 것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새로운 개념, 개념의 갱신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 동일성으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가치판단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류학과 신화는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겠다. 하도 많은 개념들이 땅바닥에 굴러다녀서 하찮아 보일지 모르지만 2018년 지금-여기에서는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하게 쓰일 수 있는 개념들의 보물창고!


2018.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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