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다윈? 굿바이 신다윈주의, 굿바이 실재론!
다양성과 동일성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동일성에 대한 전제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만약 내가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완전히 다르고 소통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숨쉬는 것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과학은 이 동일성을 최대한 간단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것 안에 밀어넣고 싶어한다. 이런 이유로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이 지난 몇 세기동안 세계의 주된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다.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은 완전히 실체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최종 입자와 법칙을 상정하면 모든 것이 결정론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 생물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생명이란 어떤 것인지, 왜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생물들이 존재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생물학이라고 보면 이 생명과학 역시 최대한으로 간단한 동일성을 찾고자 했다. 본래 진화론은 생물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고안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왜 이토록 많은 생물이 있을까’ 하는 현상에 대해 ‘진화’라는 가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진화론은 ‘다양성’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그와 정반대인 동일성의 방식으로 이해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진화론을 이해하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다윈주의로 이해하는 신다윈주의의 실재론이 자리잡고 있다. DNA라는 단 하나의 ‘실체’로 수많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생물들을 설명하는 신다윈주의는 이해하기가 쉽다. 뿐만 아니라 강력하다. 신다윈주의가 DNA라는 실체를 가지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생명 진화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신다윈주의자들에게 있어 모든 생물의 다양성과 변화의 원인은 DNA로 집약된다. 여기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보여주는 특이성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수한 시간성을 갖고 있는 생물을 DNA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굿바이 다윈?>은 이런 배경 아래에서 신다윈주의를 비판하면서 구조주의 관점에서 관계를 중심으로한 ‘구조주의 진화론’을 제안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신다윈주의의 DNA까지
앞서 말한 것처럼 옛날 사람들은 종의 다양성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플라톤은 자연철학자로서 많은 책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이데아론은 생물의 다양성을 설명해 보려는 이론의 하나로 읽을 수 있다. 개는 왜 태어나는가, 개의 이데아가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이데아가 떨어져 나가면 형상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생물은 썩고 형태는 없어져 버린다. 이데아는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이 떨어질 수도 있고 대상에 들러붙을 수도 있다. 이데아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한다. 이데아는 불변이며 대상과는 독립적으로 이 세계에 자존한다. 대단히 논리정합적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실재하는 실체로 보았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후 불변의 동일성을 가정하고 세계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서구의 철학이나 과학의 전통이 되었다. 동일성은 절대불변이자 최종적인 근거라는 이야기가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란 바로 그런 것으로, 그렇게 되면 종은 모두 불변이다. ‘진화’라는 생각은 일체 없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데아론이라는 것은 역시 ‘오랜전 이야기’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이케다 기요히코는 신다윈주의가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영혼이 불멸이듯이 DNA가 자식에게 전해지고 손자손녀에게 전해져서 영원히 인계되어 간다고 믿는 것. 거의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다.
신다윈주의는 간단하게 말해서 다윈의 자연선택설와 멘델의 유전학의 결합이다. 다윈주의는 종에 관해서 유명론적인 입장이고, 멘델의 유전학은 실재론적인 입장이기에 서로 반대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분자생물학의 발달을 통해서 다윈주의는 멘델 유전학과 화해할 수 있게된다. 즉 신다윈주의는 유전자DNA를 실체로, 본질로 여기는 실재론이 된다. 이후 DNA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만능열쇠로 설명된다. 신다윈주의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어 보이는 이타적 행동에서부터 바람기와 동성애까지 모든 행동을 유전자DNA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DNA 자체로 그 생물의 실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고양이 DNA를 세포 안에 가진 것은 고양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고양이DNA를 고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예컨대 H2O하나를 시험관에 넣었다고 이것을 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H2O가 많이 모여 서로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운동을 하는 상태를 물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실체 하나가 아니라 서로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이다.
또 한 가지. 이런 실재론에 바탕을 두는 과학은 시간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언어에서의 고유명사나 보통명사를 보면 동일성을 갖는 것은 시간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름이란 시간을 산출하는 형식이다. 특히 생물(생명)이란 시간을 산출하는 동일성인데, 과학은 이런 시간을 계속해서 배제하려고 한다. 과학이 추구하는 수식에서 시간은 죽어버린다. 다시 말해 과학(신다윈주의)는 수식(DNA) 하나로 시간이 만들어내는 역동성, 비결정성을 없애버리려고 한다.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설탕+물이 설탕물이 되려면 설탕+물에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언어구조주의에서 구조주의 진화론으로
소쉬르는 언어기초론을 공부하면서 언어의 자의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 자의성이라는 개념은 구조주의진화론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소쉬르는 ‘고양이’, ‘개’라는 이름은 하등의 실재론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순전히 자의적인 구분에 대해 붙여진 것으로 생각했다. 소쉬르 해석에 따르면 언어(기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이 두 가지가 결부된 것이다. 소쉬르에게 시니피앙으로 표현되는 시니피에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결정되는 것이다. 즉 소쉬르는 동일성을 나눌 때의 분할 방식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소쉬르는 분절자의성과 대응자의성 외에 언어의 규칙 또한 자의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자의적으로 결정된 규칙이 매번 아무렇게나 바뀌는 것이 아니다. 초기에 자의적으로 결정된 규칙은 그 뒤의 다양한 사물을 속박하게 된다. 이것이 언어의 구속성이다.
앞서말한 구조주의 이론으로 보면 생물의 언어는 아주 오래 전에 결정된 최초의 규칙에 구속되어 있어서 그리 간단히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계성을 생각하지 않고 DNA만을 연구해 가지고는 DNA와 형태, DNA와 행동의 대응밖에는 알 수 없고 진정으로 생물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전혀 진척이 어려운 게 아닐까.
신다윈주의라는 것은 단순하게 보면 동일성과 차이성을 모두 DNA 안에 집어 넣고 그 안에서만 진화를 보겠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개체, 생물, 종이라는 ‘시스템’적인 관점이 없다. 시스템이라는 관점이 없으니까, 세계는 어떤 형태로도 변할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구조주의진화론은 이와 다른 주장을 펼친다. 언어구조주의에서 구조라는 것은 분절자의성과 대응자의성을 갖는 룰인데, 그 룰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구속이 작동하여 어떤 안정된 배치를 취한다. 물질이라는 것은 기저 구조가 어느정도 안정되어 있는 배치라고 할 수 있다. 고분자 자체는 사실 무생물이지만, 고분자들이 어떤 관계성을 취하게 된 것이 생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구조주의 생물학에서는 이렇듯 고분자의 어떤 특수하고도 자의적인 관계성이 구현되어 있는 공간을 생물이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죽는다는 것은 그 공간의 룰이 파탄나는 경우를 말한다. 그 공간의 룰이 파탄나 버리면 기저의 룰밖에 안 남게 되므로, 물리화학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구조주의 진화론에서는 발생적 제약(공간의 룰)이야말로 생물의 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증식과 유전을 설명할 수 있다. 즉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생물은 공간을 확장하든가 아니면 공간을 분리해서 문화와 전통을 확장해 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생물의 생식 혹은 증식의 의미이다. 공간은 분리되어 새로운 생물이 생기지만, 분리된 공간에는 이미 룰이 정립되어 있다. 문화도 전통도 없는 공간, 즉 구조의 룰이 없는 공간에는 고분자를 넣어도 생물이 생기지 않는다. 유전이라는 것 역시 세포 안에 구현되어 있는 고분자와 고분자의 관계성의 룰이 전해진다는 것으로 이것은 일종의 문화와 전통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DNA도 유전되지만 중요한 것은 실체의 유전이 아니라 관계성의 유전이다. 인간의 언어가 사회 안에서 문화와 전통으로 전해져 가는 것처럼 세포 안에 구현되어 있는 고분자의 관계성도 일종의 문화와 전통으로서 세대를 이어가며 전해져 간다고 할 수 있다.
진화는 모순되지 않는 시스템(구조)의 부가
구조는 발생학적 제약을 가지면서 그 생물에 어떤 구조의 배치가 발생시킨다. 우선 물리화학적 구조처럼, 지구상이면 어디에든 존재하는 편재적 구조가 있다. 이것이 기저에 깔려 있는 구조인데 거기에 다른 구조들이 부가되면 고차원적인 구조가 생긴다. 나아가 인간 개체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갖고 있는 구조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배치임을 생각할 때, 인간 사회라는 것은 이 배치들이 서로 더더욱 얽혀들어 가서 보다 고차원적인 관계성을 취한 것이라 생각된다. 구조주의 생물학에서는 생물이 진화하는 것을 새로운 시스템이 부가되어 복잡해져 가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을 예로 들면, DNA에 어떤 변이가 일어난다 해도 인간 이외의 생물이 되지 않는다. 즉 모든 생물은 계층의 기초가 되는 발생적 제약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연선택의 변이가 일어난다해도, 이 제약을 벗어나 형태가 무제한적으로 계속 변할 수는 없게 된다. 이렇게 보면 DNA는 생물구조의 배치를 안정시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전은 구조 그 자체가 전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살아있음(관계)’이 유전되는 것. 외형적인 구조가 아니라, 관계성을 ‘살아있음’으로 본다면 인간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지 않을까. 인간 내부적인 관계, 즉 자신의 몸에 대해 좀 더 알려고 하고, 외부적인 환경과 다른 개체와의 관계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이 인간이 그 구조대로 ‘제대로’ 살아있다는 뜻이 아닐까. 생물 안에 구현되고 있는 구조는 정보계(게놈)과 그것을 해석하는 해석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진화는 해석계가 새로운 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살아있음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살아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동일성이라는 것은 자기만 믿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동일성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간단한 동일성은 ‘실체’인데,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두를 실체로 환원하고, 거기에 법칙을 작동시켜서 모든 현상을 도출할 수 있다면 변화하는 현실을 설명하기가 쉬울 것이다. 뉴턴 역학은 이와 같은 구상하에서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올바르다고 하면, 인간도 물질로 되어 있다고 보는 한에 있어서 결정론에 지배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결정론에 지배되면 자유는 없어진다.
뉴턴 역학은 물체들간의 인지 속도를 무한하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현재의 중력이론에 따르면 중력이라는 것은 중력자라는 입자를 교환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교환속도는 빛의 속도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신이 태양을 순간적으로 잡아채어 올리면 그 순간 태양은 없어지고 질량은 제로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지구는 태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8분동안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 돈다. 이렇듯 물질이 상대의 장소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상대가 멀 경우 모든 경계 조건을 알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150억 광년 떨어진 우주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우주가 결정론에 지배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무엇보다도 우주의 물질은 현재의 경계조건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50억 광년 떨어진 이쪽이나 맞은편쪽이나 이만큼의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그때까지는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러니까 모든 계에 있어서 미래는 비결정이다. 전부를 순식간에 조망하지 못한다면. 국소조건밖에 알지 못하는 내부관찰자 입장에서 미래는 모두 비결정이다.
생물의 경우, 이 ‘비결정성’이 시스템에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된다. 고분자가 상대를 인지하는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10배 정도 늦다. 머리속 세포가 무엇을 하는지를 손발의 세포가 순식간에 알 수는 없다. 내부 관찰자를 상정하는 한 결정론은 근사적으로밖에 성립되지 않는다. 생물처럼 상호 커뮤니케이션 속도가 대단히 느린 시스템에서는 근사적으로조차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생물의 특징이다. 결정론적인 시스템이 되어 버리면 생물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보면 생물은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하니까 살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과 거의 등가이다. 죽는다는 것은 고분자의 커뮤니케이션 속도로 상호작용을 하던 계가 붕괴되고 기저에 있는 물질의 시간 속도로밖에는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는 레벨로 떨어져 버린다는 걸 뜻한다. 예측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인간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미래의 일을 전부 알아 버린다면 생물은 죽어 버린다. 역으로 말하면 생물이 결정론적 시스템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라는 것은 소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론이나 법칙이 된다. 하지만 이 동일성이라는 것은 자의적인 방식으로 성립한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생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생명이라는, 인간이라는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어떻게 발생되었는지 그 기원, 발생론적 제약을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처음 ‘생명’, ‘인간’이 생성된 그 자의성과 비결정성을 무시하고, 그 이후로 발생된 구속만을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구속된 상황만 보면서는 생명은 제대로 살아갈수 없다. 살아있는 시스템, 생명은 결국 끊임없는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생명을 DNA라는 실체를 고집하고, 시간을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으로는 바라본다면 혹은 그 관계성으로 만들어진 구속만을 바라본다면 더 이상의 생명은 존재할 수 없게 될수도 있다.
2015.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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