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에 대한 착각
- 존재(나)와 행동과 앎은 나눠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책을 보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왜 하나라도 더 알려고 할까? 잘 살고 싶어서다. 번개가 치는 원리를 알면 공포에 떨지 않고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달과 지구 사이에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알면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이유로 공부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와 앎을 이런 방식으로, 다시 말해 객관적 진리 혹은 법칙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17세기 뉴턴이 사물의 역학법칙을 발견한 이후 우리에게 뭔가를 안다는 것, 인식하는 것은 이 법칙,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후의 앎의 행보를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더 많이 공부해서, 세계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확보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한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이제 우리가 만들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고, 모르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세상은 늘어난 인식의 양만큼 좋아졌을까? 천만에, 지구 곳곳에서는 전쟁과 분쟁이 끝친 적이 없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세상은 왜 함께 살기 어려운 곳에 되어갈까? <앎의 나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남미 칠레 출신의 생물학자인 움베르토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바로 이런 앎의 문제, 인식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인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인식을 생물학적 현상으로 바라보면서 앎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정의를 내려준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인식의 문제에서부터 생명의 정의에 관한 생물학적 근본적 물음을 거쳐서 일상경험과 윤리의 문제까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이유로 마뚜라나는 자신의 모든 강의에서 언제나 스스로를 철학자가 아니라 생물학자로 소개한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건 간에 나는 한 사람의 생물학자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이건 뭐지? 왼쪽 눈을 감고 십자가 모양을 바라보고 어느정도의 거리를 맞추면 갑자기 오른쪽의 검은 점이 사라진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종이 위에 검은 점이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의 망막에는 시신경이 통과하면서 생기는 ‘맹점’이 있다. 당연히 이곳에는 시신경세포가 없어 상이 맺히지 않는다.
우리는 무언가를 인식한다고 할 때, 우리 신체가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전제는 외부에 객관적인 물체가 있다는 생각이다. 맹점의 실험은 바로 이것,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몸으로 체감시킨다.
그렇다면 과연 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앞에 사과를 본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내가 지금 사과를 빨갛고 동그랗다고 보는 것에는 이미 생물학적 조건으로서 ‘개인의 구조’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개구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과 같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야(구조)’를 체험할 뿐이다. 여기서의 구조는 물리적 형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동일한 형태라도 다른 경험을 거쳐왔다면 다른 구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의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나만의 경험을 통해서 나만의 시야를 구성해 왔듯이,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만의 구조로 세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저자들이 확실성을 ‘타인의 인지적 행위를 보지 못하게 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확실하다고, 분명한 근거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앎의 나무>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간의 소통을 막는 이런 ‘확실성의 유혹’에 넘어가는 버릇을 떨쳐버리기를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제대로 알고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
생명의 또 다른 이름, 오토포이에시스
마뚜라나와 바렐라는 인식을 객관적 사실의 파악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생물학자들이 바라본 인식은 기존의 인식과 어떻게 다를까? 저자들은 단순히 인식현상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은 인식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생명의 기원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최초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세포활동을 관찰하면서 인식이란 외부 세계에 대한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우리의 생물학적 구조와 연결된 끊임없는 활동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보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기준으로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가의 여부를 떠올린다. 하지만 자손을 퍼뜨리는 생식과정은 생명의 본질적인 특징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식이 있으려면 먼저 원래의 개체가 정의되어야 하기때문이다. 만약 생식과정을 생물의 특징으로 본다면 생식 능력이 없는 노새는 생물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마뚜라나/바렐라는 단세포생물을 관찰하면서 생명을 오토포이에시스(자기생성체계)라고 정의한다. 오토포이에시스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세포에는 세포핵, 미토콘드리아, 리보솜, 세포막 등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있다. 여기서 마뚜라나/바렐라가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니라 세포막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이 생물이 되게 하는 핵심 구성은 세포막이라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인 저자들은 왜 핵이나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중요해 보이는 요소가 아니라 주변적 요소로 여겨지는 세포막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들이 주목한 것은 세포막의 신축성과 유연성이다. 우선 막이 없으면 ‘이것’은 세포가 될 수 없다. 세포막이 없다면 세포의 물질대사들은 마치 분자들의 수프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서 독립된 개체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또한 세포막은 주변세계와 개체를 물리적으로 구분할 뿐만 아니라 막 자체가 세포활동의 화학적인 과정에도 참가하면서 끊임없는 세포 자체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세포막을 사이에 두고 물질들이 지나다니는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순간 세포는 죽는다. 단세포생물은 이렇게 세포막을 경계로 삼아 주변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물리적, 화학적 활동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즉, 오토포이에시스란 끊임없는 생성활동을 하면서 ‘자기가 자기자신을 만들어내는 세포 활동 자체’를 뜻한다. 자기생성체계로서 세포는 이러한 자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주변 환경과 자신을 다른 것으로 구성한다. 마치 에셔의 ‘그리는 손’처럼 나의 활동이 나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생성개체에서 나(존재)와 나의 활동(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에셔, 그리는 손(1948)
구조접속, 생명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생성체계로서의 생명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명에 대한 정의와 어떤 점에서 차이를 가질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생명을 고립된 개체인 단독자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초의 생명인 세포에서 마뚜라나와 바렐라가 주목한 것은 세포핵이 아니라 세포막이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생명이란 하나의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자신들 둘러싼 환경과의 소통과 네트워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즉, 새로운 생명의 정의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점은 세포막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생명체와 주변 환경과의 관계다. 자기생성체계로서 생명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생명체는 그 자신과 주변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교환 속에서만 자기 자신을 주변과 다른 것으로 생성해내면서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가운데 어느정도까지 변해도 여전히 생명을 유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바로 구조접속(structural coupling)이라는 개념이다. 생명체가 지구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구의 대기 상태에 질소, 산소, 수소의 환경에서 안정된 상호작용 속에서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구조접속이란 생명체가 주변환경과의 재귀적 상호작용 안에서 자신의 생명조직을 잃지 않으면서 하는 활동이다. 여기서 ‘재귀적’이라는 말은 생명조직의 상호작용이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주변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개체가 변화하고, 반대로 이 개체의 변화는 주변환경에 다시 영향을 주고, 변화된 주변환경은 다시 개체에 영향을 주는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생명체가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양한 구조의 책상을 상상할 수 있다. 셋, 넷, 다섯 개의 다리를 가진 책상 구조가 가능하고, 유리, 나무, 철제로 된 다양한 재질도 가능하다. 하나의 책상은 그 조직을 유지하면서 색을 다시 칠하고 재료를 바꾸고 책상 다리의 숫자를 바꿀수도 있다. 다시 말해 구조가 바뀔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책상이 뭔가를 올려놓고 일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다면 우리는 그 책상이 조직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다세포생물 관점에서 구조접속을 살펴보자. 다세포생물인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나와 다른 인간을 포함한 주변환경과 재귀적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뿐이다. 책상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구조가 바뀔 수 있다. 넘어져서 다리에 상처가 생기 수도 있고, 특정 물질에 알레르기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큰 사고로 팔이나 다리 한 쪽을 잃을 수도 있다. 개인의 구조가 바뀐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고 고통이다. 다시 변화된 구조를 가지고 생명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람이 살아있다면, 이는 곧 주변 환경과 구조접속 상태에서 생명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오토포이에시스로서의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은 주변 환경과 구조접속을 유지하는 상태를 말한다.
생물학에서 윤리학으로
오토포이에시스라는 생명의 정의는 단세포에서만 가능할까? 단세포와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다세포생물에서도 이 개념은 유효하다. 오토포이에시스는 세포활동에서처럼 매순간 인간 자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활동이다. 매일 매일 손톱은 자라고 있으며, 피부는 환경과 내 신체 내부를 사이에 두고 새로운 피부를 형성한다. 만약 우리 스스로가 한 순간이라도 외부의 산소를 신체 내부에 공급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금새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단세포생물이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물질들을 상호교환하면서 존재했던 것처럼, 하나의 생명체가 살아간다는 것은 주변환경과 상호작용하는 활동의 과정이다. 생명활동은 결코 홀로 작동할 수 없고 주변환경과 구조접속된 채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제 생명체에게 중요한 것은 이 무한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생명조직에 어떤 것들은 독이 되고, 어떤 것들은 영양물이 되는지 또한 어떤 것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어떤 것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지의 서로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한 물질이 상황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될 때도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맺어질 수 있다.
놀랍게도 저자들은 자기생성개체라는 생명의 개념을 인간을 포함하는 다세포생물과 다세포생물들이 서로 엮여 있는 사회체계에까지 확장한다. 이렇게 되면 생물학적 관점에서 출발했던 자기생성체계라는 생명의 정의는 ‘윤리’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인식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공통성에 근거한 사회적 상호조정 속에 공동으로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립하는 윤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바탕을 둔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란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만들어낸 세계이며 이 세계는 다시 우리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이 사회적 세계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타인의 인정은 이 세계의 성립조건이다. (p14-15)
이 개념들을 조금 더 확장해본다면 수많은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체계-공동체도 하나의 자기생성체계라고 볼 수 있다. 자기생성체계로서의 사회 역시 그 고유한 특징으로서의 생명조직을 유지할 때에야 역동적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내부의 신체 조직들과 내장 기관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피가 원활하게 순환해야 하며, 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윤리를 구성해내야 한다.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공동체가 잘 유지된다는 것은 사회 내부의 인간들끼리 함께 잘 지낼 수 있어야하고, 다른 공동체와는 어떻게 긍정적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를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자기생성개체로서의 생명의 정의는 윤리학의 문제, 정치의 문제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처음에 제기했던 인식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일반적으로 인식이란 외부에 주어진 대상을 지각하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각을 매우 수동적이라고 여긴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모두 외부 대상이 원인이 되어 내게 자극을 준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대상을 오감의 감각세포가 받아들여 그 대상의 정보를 신경계를 통해 뇌로 전달하고, 그 결과로 운동세포가 반응한다는 것이 지극히 교과서적인 지각과 반응에 대한 설명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뚜라나/바렐라가 정의한 오토포이에시스로서의 생명활동은 주어진 환경을 수용하는 수동적 작용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물과 환경이 구조접속 가운데 있을 때, 그 생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그 생물 고유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사과를 다시 떠올려 보자. 우리는 사과를 본다. 우리는 흔히 사과를 보는 시각의 원인이 사과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치자. 우리는 ‘사과 보기’의 원인인 외부의 사과로 인해 그 사과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과는 내 앞에 놓인 그 사과 하나 뿐이다. 그런데 이 사과는 어디까지가 내 시각의 원인으로서의 사과고 어디부터가 내 인식의 결과로서의 사과일까?
우리는 입력으로서의 정보(사과)와 출력으로서의 행동(사과보기)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외부의 사과가 사과보기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과보기는 내 감각세포와 뉴런의 활동 때문이지 사과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과는 그 이전부터 줄곧 돌아가고 있었던 신경체계들의 활동에 합류한 것뿐이다. 이렇게 되면 외부의 사과는 시각 활동의 원인이 아닌 조건이 되고 사과와 사과 보기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가 된다. 다시 말해 지각의 원인은 그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우리의 ‘행동’과 연결된 신경체계의 감각운동인 것이다.
이쯤 되면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은 외부의 대상을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자기를 생산하던 생명활동을 통해서 오히려 대상 혹은 세계가 지각된 것이라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자기생성체계에서 나(존재)와 나의 활동(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에 더하여, 인식(앎)은 나의 행동(활동)과 분리되지 않는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는 책의 경구가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식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객관적이거나 투명하지 않다.
앎에 지름길은 없다고 하지만 <앎의 나무>를 읽는 것은 분명 앎이 삶의 문제이고, 행위의 문제라는 것을 체감하는 좋은 길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사족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마지막으로 <앎의 나무>가 쓰여진 방식과 이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앎의 나무>는 세포에서 출발하여 오토포이에시스라는 생명개념을 정의하였고, 마지막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와 사회적 현상들까지 포괄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1장부터 10장에 걸쳐 나오는 개념들과 내용들을 따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서 정의했던 것처럼 재귀적 상호작용 속에서 이 개념들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1장부터 10장까지 상호 연결시켜놓은 그물망처럼 짜여진 목차의 모습을 보라. 생명을 자기생성개체로 이해하는 것은 그들이 제시한 개념의 그물망 속에 서로 엮여져 있는 가운데에서 파악할 때 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책이 쓰여진 방식에서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방식과도 연결될 수 있다. 마뚜라나/바렐라는 독자가 책을 대상으로 놓고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에게 영향을 주고, 다시 내가 책의 내용을 다시 파악하는 방식으로 읽어나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오토포이에시스라는 관점에서 생명을 바라보고, 윤리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18. 08.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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