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 (<일리아스> 24권 마지막행)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그런데 트로이야 전쟁하면 떠오르는 '트로이아의 목마'가 나오지 않았다. 기승전결의 인과적 스토리와 반전을 좋아하는 현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트로이아 전쟁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일리아스>에 왜 '트로이아의 목마'가 나오지 않는걸까? 물론 지금까지 남아있는 호메로스의 다른 작품인 <오뒷세이아>에서도 목마는 나오지 않는다. <오뒷세이아>는 그리스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물론 여러가지 우연적인 사건들 때문이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그래도 손상되지 않는 문서(?)가 전해내려왔고, 다른 호메로스의 이야기들은 파편들로만 남았다. 사실 (내가 알기로) 트로이아의 목마 이야기는 후세의 그리스 고전을 통해서 알려졌다. 그런데 이것을 단숞나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듣기 원했던 이야기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였기 때문은 아닐까. '트로이아 목마' 덕분에 승리했지만 그리스인들을 비롯하여 고대 사람들은 사실 속임수 계략인 트로이아 목마 이야기를 부끄러워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는 좀 더 자의적인 해석을 해보자.
아킬레우스의 분노로부터 시작된 <일리아스> 마지막 부분은 아킬레우스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의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헥토르의 죽음과 장례식으로 끝난다. 좀 더 클라이막스처럼 보이는 '트로이아 목마'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그 중간에 위치한다. 구전 시대에 속한 호메로스적 인간들에게는 반전있는 내용이나 치밀한 계략에는 별로 끌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 그들은 반복해서 나오는 죽음과 장례식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왜, 공포와 두려움, 삶의 끝을 의미했던 죽음과 장례식에서 그들은 무엇을 발견했던 걸까?
끊임없는 죽음으로 이뤄진 <일리아스>를 보면서 구술적 인간들이 죽음으로 돌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오해해선 안된다. 사실 그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삶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죽음에 직면했다. 장례식만큼 정면으로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의례는 없다. 동료의 장례식을 보면서 전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차피 죽을 인생, 그냥 흥청망청 살아야지? 아니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그냥 대충 살면 되겠네? 니체는 바로 이들의 모습에서 '삶을 사랑하라(amor fati)'라는 생각을 건져냈다. 대충 사는 삶이 아니라 그 순간이 영원토록 반복되더라도 껴안고 살아가겠다는 영원회귀적 삶!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 아니다.
죽음의 바로 뒷면에 역동적인 삶이 있으며 죽음과 삶은 계속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죽음을 직면하지 않고는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역설적으로 죽음이 삶의 일부이고, 삶 역시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보여준 영웅적 삶을 살 수 있다. 죽음을 좀 더 세밀히 살펴볼수록 삶은 더욱더 가벼워지고 열정으로 가득할 수 있다. 일찍 죽어야 된다는 것도, 그렇다고 영생하는 삶을 추구하는 삶도 아니다.
그리스인들뿐 아니라 트로이아 사람들에게 이겼는가 졌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한 순간 한 순간 나는 어떤 삶의 순간들을 보내고 있는가.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죽음을 피하고 더 긴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니다. 반짝이는 삶의 순간을 생성하고 살고 있는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과 찬란한 장레식, 프리아모스와 모든 트로이아인들의 눈물로 가득찼던 헥토르의 장례식. 사실 그 모든 의례와 슬픔은 찬란한 삶의 순간들을 보여준 영웅들에게 바치는 찬양이자 또한 동시대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삶의조건으로서거짓'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I의 정신을 닮아가는 인간 (feat. AI 바둑 이긴 신진서) (1) | 2026.07.30 |
|---|---|
| 노이즈 캔슬링, 세계까지 캔슬링? (0) | 2026.07.27 |
| 행복의 슬픔 (1) | 2026.06.10 |
| AI판사가 도입되면 벌어지는 일들사진 (1) | 2026.06.02 |
|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feat. 무사여신과 나) (1) | 2026.04.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