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슬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이번에 <즐거운 학문>을 읽으면서 다시 만난 이 구절을 사실 오래 전에 품었던 적이 있다. 행복이 어떻게 슬픔이 될 수 있나. 행복과 슬픔은 기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 아닐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로부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밀란 쿤데라가 이해한 영원회귀의 재현이다. 책의 거의 막바지에서 엘리트였던 프란츠와 테레자가 허름한 술집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테레자는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고 말한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니체가 말한 행복의 슬픔이다.
내가 가진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기껏 내가 가지고 있는 이해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인과적 논리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논리를 가지고서는 밀란 쿤데라에 가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말을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 이 표현 "행복의 슬픔"이란 것이 내 속의 무언가와 접촉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방울의 느낌.
참, 여기 저기를 많이 거쳐서 답을 찾았다. 그리스 비극과 신화, 아낙사고라스의 우주론, 그리고 다시 니체를 읽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 말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마도 내가 찾은 답은 내가 오랫동안 덮고 있던 심연과 연결되어 있을것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보고 나니 여러가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뭔 소리인줄도 모르고 읽었던 시, 소설들이 다시 보였다. 형체가 없는 그림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논리로는, 불과 3-4백년밖에 되지 않는 과학과 이성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다른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논리와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뭔가 나를 건드리는 것이 있다면 버리지 말고 시간을 들여서 품고 있어보자. 그러다보면 불현듯 그것이 무엇인지 알것 같은 순간이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이해되지 않는 그것을 계속해서 품으면서 표현해보려는 시도다.
최선의 미래 음악 - 내게 최고의 음악가는 가장 깊은 행복의 슬픔만을 알고, 그 외의 다른 슬픔은 모르는 음악가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음악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니체 <즐거운 학문> 183절)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84쪽)

* 내가 도착한 곳
형식(form)은 단순히 외형만을 말하지 않는다. 형식 자체가 발생시키는 특성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가장 큰 비밀은 상품이라는 형태(form)에 있다고 말했고, 근대적 인간을 생산하는 형식(form)으로 푸코는 법(기준, 규칙)에 예속된 인간을 언급했으며,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 학교는 탈락자를 양산하는 기괴한 양식(form)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이라는 말은 소포클레스의 마지막 비극 작품에 나오는 미다스와 실레노스의 대화를 떠오르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 묻는 미다스 왕의 질문에 “인간의 부를 경멸하는” 실레노스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계속 다그치는 미다스 왕을 향해 “하루살이에 불과한 덧없는 존재”라고 일컬은 뒤, 마침내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 그 다음 좋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가능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라니! 비관도 이런 비관이 없을 것 같은 답변이다. 하지만 고통과 죽음을 삶 가까이에 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추구했던 그리스인들을 생각해보면 실레노스의 대답에는 어떤 비밀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낙시만드로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에 따르면 우주는 순수한 1차 물질, 원소로 존재했다. 하지만 세계가 형성되면서 개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원소와 원소가 결합해야 했다. 즉, 존재가 탄생하기 위해서 우주적 질서, 우주적 도덕이 망가져야 했다. 존재는 그 탄생 자체가 부정의로부터 출발했으며, 그렇기에 우주적 도덕을 회복하기 위해서 죽음, 해체는 필수적이다. 한 마디로, 아낙시만드로스에게 “탄생은 범죄이며, 성장은 일급의 강도질”일 뿐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주적 질서에 어떤 해로움도 주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태어났다면 가능한 한 빨리 원소로 돌아가 우주적 질서를 회복하는것이 마땅하다는 주장.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mortal)로, 태어나면서부터 시한부의 인생을 살아간다. 영원히 살아가는 인간은 없으며, 영원히 살아간다면 인간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또한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교묘히 전도시키며 인간의 삶에 무한한 긍정을 불어넣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에게 부러워하는 단 한가지가 바로 죽음(mortality)이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삶은 모든 순간이 아름다답고, 고귀할 수 있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반면에 영원히 죽지 않으며, 죽을 수 없는 존재인 신의 어떠한 행위도 고귀하다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슬픔의 형식이기 때문에 행복의 내용이 가능하다는 신묘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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