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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조건으로서거짓

AI판사가 도입되면 벌어지는 일들사진

by 홍차영차 2026. 6. 2.

https://naver.me/GsBBnQng

 

캠벨 :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지요. 사람들은 그 친구를 보고 일어서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입고 있는 법봅, 그 친구가 맡고 있는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판사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 왕이나 여왕에 대하여 반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격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지닌 신화적인 역할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

모리어스 :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신화의 의례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군요. ......

백인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원시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 많이 보아오셨을 테지요. 백인의 문명이 유입되면서 그들의 사회는 분열하고, 타락하고, 병들고 맙니다. 신화가 사라지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조셉캠벨 <신화의 힘> 41, 42쪽)

 

 

어릴적부터 궁금했다. 판사 역시 법원에서 월급받고 일하는 일개 근로자인데 법정에 판사가 들어올 때 사람들이 왜 일어서야할까. 게다가 우리는 판사의 재판결과에 대해서 마치 신(?)의 결정인듯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판사는 단순히 한 인간이 아니라 법주체를 생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신화적 인격의 현현이고, 재판이란 법적 신화를 (재)생산하는 최정점의 의례이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면 법정의 판사와 교회의 목사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법정에서 입는 판사 가운은 예배당에서 입었던 목사 가운과 거의 흡사하고, 카톨릭의 신부복 역시 별반 차이가 없다. 의복만이 아니다. 재판이 일어나는 법정의 모습은 교회 예배당과 겹쳐 보인다. 비이성적이고 미신적으로 보이는 종교와 영성은 사실 이성과 논리로 변장한 다른 신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예배나 성당의 미사에서 행해지는 의례를 생각해보자. 매주 반복되는 이 예배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정말 예배라는 의례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또한 신을 찬미하고 찬양하면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걸까. 반복적인 예배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또 그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 양식을 몸에 새기는 것이다. 사실 그가 구원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구원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가 신의 세계에서 자신(주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죄인이나 구원받은 사람 모두 똑같은 틀 속에서 행동할고 있는 것이다. 니체가 고민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니체는 신이 죽은 사회에서 여전히 과거의 의례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줬다.

 

니체가 영원회귀와 위버멘쉬라는 새로운 도덕과 인간형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법주체라는 색다른 개인을 생산해내고 있다. 미셸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후 500년 사이의 주체를 해석하면서 현대에는 오로지 법주체만이 생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현대의 개인들의 행동양식과 도덕은 오로지 문자 시대의 정수(essence)인 법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주체 생산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법정의 재판이다.

교회의 예배와 마찬가지로 법정의 재판 목적은 단순히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재판에 임하는 개인에게는 재판 결과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소정의 의례로 이루어진 재판은 계속해서 법적 주체를 생산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유죄 판결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무죄 판결에 기뻐하는 사람 모두 스스로가 법에 종속된 법적 주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 사회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악무도한 사람도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아니다. 법이라는 의례를 무시하는 사람, 다시 말해서 문자 시대의 핵심인 법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다.

 

얼마 전 윤석열이 탄핵당했을 때, 윤석열 지지자들이 서부지법 폭동을 일으켰다. 윤석열 탄핵 반대집회에도 놀랐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서부지법 폭동'에 깜짝 놀랐다. 아니 놀라는 걸 넘어서 당황하고 뭔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폭동은 단순한 폭력 사태를 넘어서 사회 전체의 기반을 흔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서부지법 폭동은 단순히 윤석열 탄핵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문자의 정신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윤석열 탄핵은 이 사건의 촉매역할이었을 뿐이다.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은 너무 많다. 탄핵 찬성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의원들을 찾아서 위협할 수도 있고, 또 거리에 나와서 대규모 집회를 열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법원', 서울서부지방법원이었다. 현대 사회의 주체, 법주체를 생산하는 신전이자 매일 매일 법주체 생산의 의례가 일어나는 곳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수천년 전부터도 성전을 탈취하는 것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허락되지 않았다. 트로이아 전쟁에서 아폴론 신전을 더렵혔던 소(小)아이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돌아가는 길에 신들의 분노로 바다에서 죽임을 당했고, 아폴론의 사제였던 카산드라를 전리품으로 데려간 아가멤논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런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

법원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가히 성전을 더럽히는 일과 같다. 자신들도 모르게 우리가 이 서부지법 폭동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판사의 판단에 깊은 의심을 품고 있고, 법원과 재판의례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감각을 갖게 되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면 되는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흐름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점점 더 신성함이 사라지고 있는 법정, 아우라를 잃어버린 판사들을 보면서 법적 주체들이 나아갈 길을 잃어버렸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법적 주체만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고발했다. 법적 주체가 된다는게 문제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길이 왜 하나밖에 없는가라는 점을 문제삼았다. 그런데 지금은 법적 주체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 마치 19세기 후반에 니체가 더이상 신을 믿을 수 없는 사회, 이제 예배당에 가서 예배할 수 없는 정신공간을 가진 사람들이 직면한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도 100~200년 정도 유지했던 법적 주체가 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사람들. 왜 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가진 존재들. 여기에서 다시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이 사람을 보라>의 부제)'라고 물었던 니체의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은 혼자서는 용서하지 못하며, 그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들은 범해진 죄를 무화시킬 힘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죄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고, 시간을 지워버리고,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무로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다. ...... 인간은 신의 죄사함에 의지해서만이 인간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루드빅, 당신은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요. 루드빅,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게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밀란 쿤데라 <농담> 323~324쪽)

 

 

사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이고, 다시 돌아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신화와 의례다.

현대인들은 온갖 신비를 박탈당했다. 한 마디로 신화에 대한 믿음을 박멸당한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용서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거짓, 오류, 왜곡'은 속마음을 갖게 된 현대인들, 문자의 발명 이후에 속마음을 갖게 된 인간들에게 필수적 도구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런 왜곡과 오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른다. 예배라는 의례를 통해서 자신 안의 죄악과 불안, 소외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현대인들은 이런 의례에 대해 참으로 무능력하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새롭게 부상한 것이 정신분석이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이끌고 있는 무의식 - 어떤 면에서 신적인 정신공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의 현대 버전으로서 정신분석이 중요하게 등장했다. 또 다른 하나가 신화와 의례다. 다시 주목하고 창조해내야 하는 것으로서 신화와 의례.

법적 주체를 생산하기 위해서 수많은 의례들이 행해졌다. 그 중 하나가 법정에 판사가 들어오면 모두가 일어서는 것이고, 빨간불을 보면 멈추는 것이고, 경찰을 보면 몸가짐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새로운 신화를 발명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의례를 실천할 시기다.

 

 

자, 그렇다면 AI판사가 도입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단순히 더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빠르고, 논리적인 AI판사가 도입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조금 빠르고, 공정해지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다. 만약에 조만간 AI판사가 도입된다면 이는 법적 주체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주체 생산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시대적 증상으로 봐야 한다. AI판사를 신격화하는 방식으로 돌아가게 될까. 아니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극단으로 신화와 신비를 저 멀리 던져버리는 시대로 치닫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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