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실이 감긴 실패를 던졌다 다시 잡아당기면서 놀았다는 Fort(가버린)-da(거기) 놀이는 가장 잘 알려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사례 중 하나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책을 대충 집어 들어도 이 이야기는 들어있다. 사실 사례도, 프로이트의 해석도 아주 명쾌하다. 아이가 실패를 던졌다가 다시 끌어당기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이유를 모르고 사라지는 어머니의 부재와 돌아옴을 놀이로서 극복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처음 이 해석을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텍스트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사례를 설명해주지만 속으로는 "이게 말이 되나?"라고 생각했다. 그냥 아기들이 하는 여러가지 놀이가 있을텐데, 이것중 하나를 보고 프로이트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와중에 이번에 'Fort-da'를 설명해주는 프로이트의 논문을 읽었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했던 라캉이 이런 것이었을까.
'쾌락원칙을 넘어서' 2장에서 Fort-da 사례가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Fort-da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실타래를 아무 곳이나 던진 것이 아니다. 커튼 뒤, 침대 아래와 같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던졌다는데 있다. 덧붙여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는 실패를 ... 늘어뜨려서 마루 위를 끌고 다니는 일이나 ... 마차 삼아 노는 일은 ...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아이는 아무렇게나 놀았던 것이 아니라 그 실타래가 커튼 뒤로 사라졌다가 실을 당기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놀이로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할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사라지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닌데 아기는 왜 이런 것을 놀이로서 반복하는걸까. 왜냐하면 어머니가 사라지는 것은 결과적으로 "즐겁게 돌아올 것에 대한 필수적 예비조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번째로 주의해서 봐야할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엄마가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사건은 아기에게 아주 '수동적인' 상황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아이는 일종의 외상을 입힐 수 있다. 절대적으로 자기 목숨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진다 - 엄청난 공포와 절망! 또 갑자기 나타나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안아주고 젖을 물린다 -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이지 않을까. 아이는 이 '수동적인' 상황, 자신을 압도하는 이 경험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이해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능동적인' 위치에 서서 이 놀이를 발명하고 행한다. (*라캉식으로 본다면 이 Fort-da 놀이는 아이가 처음으로 상상계를 벗어나서 상징계에 입문하는 단계처럼 보인다.)
그는 밤에 부모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어떤 것을 만지지 말라거나 어떤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성심껏 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그를 몇 시간 동안 떠나 있어도 결코 울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손수 자신을 먹여 길러 줄 뿐만 아니라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을 보살펴 주는 어머니에 대해서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착한 어린아이는 이따금씩 자기의 손에 잡히는 작은 물건을 무엇이든 구석이나 침대 밑 등으로 집어던지는 당혹스러운 습관을 갖고 있어서, 그의 장난감을 찾거나 그것을 집어 올리는 것이 큰일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런 짓을 하면서 그 아이는 관심과 만족의 표현이 수반된 크고 오래 끄는 '오-오-오-오' 소리를 냈다. 그의 어머니와 나는 이것이 단순한 감탄사가 아니라 독일어로 fort(가버린)를 의미한다는 생각에 일치했다. 나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하나의 놀이라는 사실과 그가 장난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가게'하는 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 아이는 실이 감긴 나무 실패를 갖고 있었다. 그것을 뒤로 늘어뜨려서 마루 위를 끌고 다니는 일이나 그것을 마차 삼아 노는 일은 그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실패의 실을 잡고 대단히 익숙한 솜씨로 그것을 커튼이 쳐진 그의 침대 가장자리로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실패는 그 속으로 사려졌고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인상적인 '오-오-오-오' 소리를 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실을 잡아 당겨 그 실패를 침대 밖으로 끌어냈고 그것이 다시 나타나자 즐거운 듯 da(거기에)라고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라짐과 돌아옴이라는 완벽한 놀이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첫 번째 행위만 목격했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로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되었다. (282)
......
그 아이가 그의 어머니의 떠나감을 기분 좋은 것, 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으로 느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놀이로서 이 고통스러운 경험의 반복이 어떻게 쾌락 원칙과 일치한단 말인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어머니의 떠나감은 즐겁게 돌아올 것에 대한 필수적 예비 조치로서 상연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 놀이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후자, 즉 어머니의 즐거운 귀환에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편견 없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아이는 다른 동기에서 자신의 경험을 놀이로 바꿨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처음에 그는 '수동적인' 상황에 있었다, 그는 그 경험에 의해서 압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놀리로 반복함으로써 그는 '능동적인' 역할을 취하게 되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쾌락원칙을 넘어서' 283쪽)
Fort-da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문을 읽으면서 더 놀라웠던 점은, 이 놀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이 곧바로 예술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예술가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 외상(trauma)으로 보이는 상황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경험적으로 보아도 처음 인문학, 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쓰는 글쓰기는 대부분 자기 고백이다. 그동안 덮어두었던 심연을 대면하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글쓰기 발표는 대부분 알수 없는 울음과 웃음을 거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끝난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점점 공동체적인 상실이나 아픔을 대면하는 방식으로 넓어진다.
Fort-da 놀이는 예술론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수동적'이고 '압도적'인 상황을, 이제는 능동적이고 그 상황을 조망하는 위치에서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수십번, 수백번 계속해서 똑같은(?) 것처럼 보이는 작업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이해와 눈이 아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이 설득될 수 있는 "충분한 수단과 방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예술이 치유적인 힘을 갖게 되는 이유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관점에서 이를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예술은 언어(문자)로서 표현할 수 없었던 경험을 비문자적인 모든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다.
마치 과자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너무나 간단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양가적이다. Fort-da 놀이를 생각해보자. 자신을 먹여주고 씻겨주고 똥을 치워주고, 따뜻하게 해주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 경험은 어마어마한 충격과 공포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빨리 그 존재가 돌아오기를, 조금 뒤에는 이 존재에 대한 무시무시한 핏빛의 복수감정이 일어날 수 있다. 즉 나중에 표현해야 하는 것은 어떤 문자나 단어로 된 개념이 아니다. 예술이 표현하고 싶은 것, 이해하고 싶은 것은 정동, Affect다.(?) '무서웠다', '공포스러웠다'라는 단어들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얀 종이에 검은 구체를 그리면 될까. 아니면 깡총깡총 뛰면서 자기 옷을 찢는 것으로 가능할까.
자유연상이라는 방법이 중요한 이유다. 표현에 한계를 두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나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형성된 규칙, 법, 사회적 관습의 한계를 부숴버리지 않으면 쉽지 않다. 양가적이라고 하는 이유다. 보이지 않는 이런 시선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너무나 쉽게 해결(?)될 수 있지만 반대로 내면의 시선(양심?)을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반복해서 '현대인에게 예술은 생존욕구'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분석이 예술과 종교(신화)에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신이 죽어버린 세계 속에서, 더 이상의 어떤 종교도 신화도 용납할 수 없는 정신공간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예술과 정신분석뿐인듯 하다. 물론 니체가 마지막으로 <차라투스트라>를 우리에게 던졌던 것처럼, 새로운 신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정신분석-예술-굿-무의식
놀이 속에서 그들은 실제 생활에서 그들에게 큰 인상을 끼쳤던 것은 무엇이나 반복하며, 이러한 반복을 통해 그들은 그 인상의 강도를 소산Abreagieren시키고, 자신들이 그 상황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84) ...... 경험의 불쾌한 성격이 반드시 놀이에 부적합한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 어린아이가 경험의 수동성에서 놀이의 능동성의 상태로 변모해 감에 따라 그는 불유쾌한 경험을 그의 놀이 친구에게 전이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런 방식으로 대체된 인물에 복수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어른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예술적 노이와 예술적 모방은 ... 관객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면제해 주지는 않지만(예컨대 비극에서), 귿르은 그것을 고도로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한 사항으로 덧붙이고 싶다.
이것은, 심지어는 쾌락 원칙이 지배적인 상황하에서도 그 자체로는 불쾌한 것을 마음속으로 상기해 보고 작업해 볼 주제로 만들기에 충분한 수단과 방법이 존재한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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