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살아있다고 느끼는가.
거대한 혁명에 참여할 때? 아니면 수많은 제자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글을 쓸때? 그것도 아니면 엄청난 돈을 벌었을때?
루쉰은 '죽은 뒤'에서 살아있음과 죽음 사이에
뭔가 거창한 의미와 내용, 행동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루쉰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등줄기를 기면서 나를 간지럽히는 개미'를 털어낼 때,
또 '콧구멍에 들어간 먼지로 시원하게 재채기'를 할 때,
그리고 귀찮게 계속 얼굴 주위를 날아다니는 파리를 쫓아낼 때였다.
루쉰이 사설에 쓴 글을 보면 아주 사사로운 이야기가 많다.
쫌생이 같은 마음으로 복수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적)의 사소한 실수를 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랩 디스배틀처럼.
살아있다는 것
뭔가를 바꾼다는 것은 거대한 뭔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바로 이렇게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저항할 때이다.
삶의 순간 순간에 일어나는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은 일들을 그냥 넘기지 않을 때
바로 그 때 변화는 시작한다.
https://cafe.naver.com/afterworklab/1622
죽은 뒤
나는 내가 길거리에서 죽어 있는 꿈을 꾸었다.
거기가 어딘지, 내가 어떻게 거기로 갔는지, 어쩌다가 죽게 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요컨대 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무렵, 나는 거기에 죽어 있었던 것이다.
까치 소리가 몇번 들리더니,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공기가 맑고, 흙 냄새가 섞였기는 하나 상쾌한 것이, 동틀 무렵이리라. 나는 눈을 뜨려 하였으나 떠지지가 않았다. 마치 내 눈이 아닌 것처럼. 그래, 팔을 들어 보려 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공포의 화살폭이 홀연 심장을 뚫었다. 나는 살아 있을 때 장난 삼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운동신경만 훼멸되고 지각은 남는다면 그건 온전히 죽는 것보다 훨씬 무서울 것이라고. 뜻밖에 나의 예상은 적중하였고 내 스스로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 그들 발치에서 황토가 일어 콧구멍 속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재채기를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마음만 간절했을 뿐.
......
그런데 아마 개미겠지, 개미 한 마리가 내 등줄기를 따라 기는 것이 간지럽다. 꼼짝할 수 없는 나로서는 놈을 몰아낼 재간이 없다. 평상시였다면, 조금만 뒤척여도 달아났을 텐데, 뿐인가, 허벅지로 또 한 논이 기어오른다! 이놈들 도대체 뭐하는 거야? 버러지 놈들!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파리 한 마리가 내 관자놀이에 내려앉아 몇 발짝 기다가 날아올랐고, 다시 내려와 코끝을 핥았다. ...... 다른 몇 마리가 눈썹에 모여 활보하는 바람에 눈썹 뿌리가 흔들렸다.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 견딜수 없이.
문득, 바람이 일면서 뭔가가 나를 덮치자 놈들이 흩어졌다. 떠나면서도 이런 말을 한다 -
"아깝도다!"
나는 화가 치밀어, 혼절할 뻔했다.
......
(루쉰 <루쉰 전집 3> 그린비, '들풀' 중 '죽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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