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를 벗어나게 만드는 유일한 실재
- 루쉰<죽은 뒤> (1925.7.12) -
<죽은 불>(1925.4.23)부터 <죽은 뒤>(7.12)까지 7작품은 모두 “나는…… 꿈을 꾸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7작품 모두는 ‘꿈’에서 깨어나는 일 없이 끝난다. 유일하게 꿈에서 깨어나는 <무너지는 선의 떨림>조차 ‘꿈 속의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깨어난 상태 역시 꿈 속이다. ‘사방이 벽면으로 막힌’ 현실 속에서 루쉰이 할 수 있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었을까. 루쉰이 말하는 꿈은 어떤 것일까?
7개의 작품 모두와 연관된 주제는 ‘죽음에 대한 의미’이다. 그 중 마지막에 쓰인 <죽은 뒤>에서는 ‘죽음’ 그 자체를 사고의 끝까지 밀어붙이고, 죽음을 통해 ‘생명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즉 “운동신경만 훼멸되고 지각”만 남아있는 상황을 만들어, 생명과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초월적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죽은 뒤>에서 ‘내가’ 죽음을 실감한 것은 대의를 위해 엄청난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아니다. 살아있을 동안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여기던, ‘생명 그 자체’와는 아무 관련 없는 것이라고 여기던 ‘눈을 뜨고, 팔을 들고, 재채기’와 같이 아주 사소한 것을 못할 때이다. 반대로 이와 같이 사소해 보이는 움직임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같다. 마치 ‘죽은 불’처럼. 등줄기를 따라 기어 가는 ‘개미 한 마리’를 몰아내지 않고, 관자 놀이에 앉아 있는 ‘파리 한 녀석’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정도 참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괜시리 ‘난리법석’을 피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루쉰은 이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조목 조목 따지면서 쉬지 않는 싸움을 해 왔다. 싸우려고 사는 사람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그가 논쟁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하지만 생명이라고 해서 꼭 ‘무엇가’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6면의 벽’에 부딪힐 때는 견뎌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관 속에 넣은 녀석들이 ‘속옷 자락을 접힌 채’로 놓아두어서 불편하지만, 이것도 ‘몸에 밸’ 것이기에 그리고 금세 썩어질 것이니 참을 수 있다. 이럴 때는 차분이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 된다. 죽음 속에서 고서점 점원이 20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공양전>을 내밀며 읽어보라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살았을 때에도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던 ‘오랜된 것들’이 나를 짜증나게 한다. 죽음 가운데 ‘죽지 않으려면’ 견뎌내야 한다. 여기서도 나를 깨우는 것은 작은 개미 한 마리이다.
이처럼 루쉰은 한 편으로는 모든 것에 싸움을 거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강력하게 혁명하는 전사의 모습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종이 전사’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희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절망하는 듯 보이기도 하다. 루쉰의 살아가는 모습은 “어느 한쪽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분명히 자신의 ‘선택’과 ‘거부’를 통해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통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죽은 뒤>에서 루쉰이 말한 것처럼, 죽음이란 죽었다고 끝나버리는 ‘생명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루쉰에게 죽음은 매순간의 ‘썩어감’을 통해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일곱 작품에 모두에 나오는 꿈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 꿈은 삶(생명)과는 전혀 상관 없는 공허한 놀음나 불가능한 일을 공상하는 것이 아니다. 꿈이란 그에게 화(化)할 수 있는 기회, 다르게 되는 것이고,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르게 된다는 것은 현재의 내가 ‘죽는 것’이고, 그것이 루쉰에게는 ‘생명’ 혹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법이다. 꿈 속에서 화(化)한 루쉰은 죽음처럼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불꽃같은 것이 번뜩이는 것’을 실감한다. 루쉰에게 꿈은 희망과 같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삶의 동력이 되고 있다.
2015.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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