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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읽기

죽음의 거울에 비친 생명

by 홍차영차 2017. 9. 29.

죽음의 거울에 비친 생명

 

 

 

1. 모순의 언어 혹은 모호한 태도의 루쉰

 

“가령 말일세, 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에 수 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머지 않아 숨이 막혀 죽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 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 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세. 그러면 이 불행한 몇몇에게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게 되는데, 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방을 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

그렇다. 비록 내 나름의 확신은 있었지만, 희망을 말하는데야 차마 그걸 말살할 수는 없었다. 희망은 미래 소관이고 절대 없다는 내 증명으로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도 글이란 걸 한번 써 보겠노라 대답했다.

<<외침>>, <서문>(1922. 12. 3)

 

돌이켜 보면 나에게 ‘루쉰을 읽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철방’에 대한 루쉰의 태도를 이해하는 작업이었다. 처음 글을 부탁하러 온 친구에게 루쉰은 분명히 말했다. 철방을 깨뜨리거나 부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그 속에 있는 몇몇을 깨우는 것은 그들을 불행 속에서 죽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루쉰은 그 사실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말하는 친구의 주장을 듣고 바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음…이런 태도는 뭘까? 루쉰은 이렇게 귀가 얇고 가벼운 사람이었던가. 친구의 말을 듣고 스스로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은 절대 믿지 않지만 그저 도와주겠다는 것인지 루쉰의 태도는 모호한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소설집 <<외침>>, <<방황>> 그리고 산문시 <<들풀>>의 글들과 그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특히 그가 사용하는 모순적인 말들,  ‘죽은 불’, ‘낱말없는 언어’, ‘일어나 앉은 주검’과 같은 말들은 모호한 그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증거처럼 보인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했던 나에게 루쉰의 이런 태도는 힘을 쓸수록 이해할 수 없는 늪에 빠져들어가는 것이었다. 루쉰의 이런 태도가 왜 마음에 걸리적 거릴까 생각해보니, ‘효율’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척도에 내 사고가 경직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런 효율의 척도에서 루쉰이 보여주는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해될 수 없고 항상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루쉰은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 서 있었지만 근대적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중국이 근대에 들어서자마자 근대를 비판하고 반성했으니까. 그런데 루쉰은 어떻게 이런 태도를 갖게 되었을까? 다행인 것은 <<들풀>>을 읽게 되면서 그가 취하는 삶의 방식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말하는 ‘죽음’, ‘절망’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쪽 아니면 저쪽’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던 한 인간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확인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처음 회색인간처럼 보였던 루쉰, 절망과 희망, 삶과 죽음 사이를 방황하면서도 누구보다 더 견고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갔던 루쉰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한 마디로 어떻게 루쉰은 이런 모순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한다.

 

2. 절망으로부터 출발하다

앞서 말한 루쉰의 모호한 삶의 방식와 모순의 언어는 <그림자의 고별>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천당’, ‘지옥’ 그리고 ‘미래의 황금세계’에도 가고 싶어 하지 않다. 그는 차라리 무지(無地)에서 방황하고 싶다고 말한다. 좀 더 살펴보다 보면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 자신을 고백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천당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싫어하는 것이 지옥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내가 싫어하는 것이 미래의 황금세계에 있으니, 나는 가지 않겠소.

그런데 그대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오.

동무,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소, 나는 머무르지 않으려오.

나는 원치 않소!

오호오호, 나는 원치 않소. 나는 차라리 무지(無地)에서 방황하려 하오.

<<들풀>>, <그림자의 고별>(1924. 9. 24)

 

1911년 신해혁명 이후 피어나는 근대의 물결 속에서도 그는 결코 편할 수 없었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4000년동안 ‘식인문화’에 물든 중국의 전통 사회를 확인했다. 그것과 결별하지 않고서 어떤 ‘혁명’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중국을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중국의 전통과 구습에 대해 비판의 강도를 높여갈수록 스스로가 그 ‘비판과 개혁’의 대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루쉰은 어려서부터 과거 시험을 위해서 팔고문과 같은 중국의 전통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귀와 눈이 전통에 물들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늘 괴로워하고, 숨이 막힐 듯한 무거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림자의 고별>에서 그림자가 작별을 고하는 세상은 바로 루쉰 스스로가 인식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따르지 않겠다는 ‘그대’가 바로 루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서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 마치 그림자가 암흑과 광명, 그 어디서도 사라지게 되는 것처럼. 결국 그림자는 천당과 지옥이 아니라 “무지(無地)”에서 어쩔수 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썩어가는 현실 속 루쉰은 자신을 그림자와 같은 ‘절망적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절망적 존재라 할 때, 떠올려지는 것은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깝다. 루쉰이 보기에 생명이 이 세계에 온 것은 스스로 바라서가 아니라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 세계에 던져진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던져진’ 루쉰은 부패한 세상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결국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가능하다는 점을, 자신도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눈을 감아버린다고 해도 이 사실은 사라지지 않다. 루쉰이 ‘절망’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갖고 있는 ‘나’는 결과적으로 ‘나’를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 루쉰은 이렇게 ‘죄책감을 가진’ 태도로 삶(생명)의 의미를 찾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에는 고통과 쓸쓸함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희망적인듯 하면서도 불안과 긴장이 <<들풀>> 속에 나타나는 이유이다.

 

 

 

3. 죽음의 실감에서 생명을 느끼다

<<들풀>> 중에서 <죽은 불>(1925. 4. 23)부터 <죽은 뒤>(7.12)까지 7작품은 모두 “나는…… 꿈을 꾸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7작품 모두는 ‘꿈’에서 깨어나는 일 없이 끝난다. 유일하게 꿈에서 깨어난 <무너지는 선의 떨림>조차 ‘꿈 속의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깨어난 상태 역시 꿈 속이다. 사방이 벽면으로 막힌 ‘절망’ 속에 살았던 루쉰이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몽상하는, 꿈 꾸는 것이었을까? 

위에서 말한 7개 작품을 모두 연관된 주제는 죽음이다. 특히 그 중 마지막에 쓰인 <죽은 뒤>는 ‘죽음’ 그 자체를 사고의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즉 루쉰은 ‘운동신경만 사라지고 지각만 남아 있는 극한 상황’을 만들어 스스로가 자신의 죽음 그 자체를 관찰하고 실감하면서, 죽음 그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생명의 의미’를 궁구하도록 한다. 흔히 생명과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죽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살아있는 것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은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눈을 뜨려 하였으나 떠지지가 않았다. 마치 내 눈이 아닌 것처럼. 그래, 팔을 들어 보려 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중략) 구경꾼들, 그들 발치에서 황토가 일어 콧구멍 속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재채기를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마음만 간절할 뿐. (중략)

그런데, 아마 개미겠지, 개미 한 마리가 내 등줄기를 따라 기는 것이 간지럽다. 꼼짝할 수 없는 나로서는 놈을 몰아낼 재간이 없다. 평상시였다면, 조금만 뒤척여도 달아났을 텐데. 뿐인가 허벅지로도 또 한 놈이 기어오른다! 이놈들 도대체 뭐하는 거야? 버러지 놈들!

<<들풀>>, <죽은 뒤> (1925. 7. 12)

 

<죽은 뒤>에서 ‘내가’ 죽음을 실감하는 순간은 대의를 위해 엄청난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아니었다. 살아있을 동안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여기던, 생명(삶)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라고 여기던 ‘눈을 뜨고, 팔을 들고, 재채기를 하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을 못할 때이다. 이와 같이 사소해 보이는 움직임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 ‘생명(삶)’은 마치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루쉰에게 있어 죽음이란 그렇기에 ‘초월적’이거나 현재의 삶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 등줄기에 있는 ‘개미 한마리’를 몰아내지 않고, 관자 높이에 앉아 있는 ‘파리 한 녀석’을 쫓아내지 못한다면 이는 살아있는 것(생명, 삶)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죽음은 삶(생명)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루쉰은 어쩌면 이처럼 쪼잔해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에 더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남들이 말했던 ‘한 글자, 한 글자’를 그냥 지나치는 일 없이 조목 조목 따지면서 쉬지 않는 싸움을 해 왔다. 일평생 싸우려고 사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그가 논쟁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그는 논쟁을 통해서 자신이 썩어지는 것이나, 더럽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루쉰에게는 죽음과 생명을 그 극한/무한(limit)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그가 제대로된 절망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극한의 생각은 바로 꿈을 통해서 가능했다.

 

4. 죽음의 거울에 비친 생명

루쉰이 <<들풀>>의 머리말을 쓴 것은 1927년이었습다. 머리말에는 1927년에 일어났던 4.12사변으로 ‘비분에 찬’ 루쉰의 심정이 글로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들풀>> 머리말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루쉰이 생각하는 ‘절망’, ’죽음’에 대한 의미이다.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실함을 느낀다. 입을 열려고 하면 공허함을 느낀다.

지난날의 생명은 벌써 죽었다. 나는 이죽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일찍이 살아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은 벌써 죽었다. 나는 이 썩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공허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생명의 흙이 땅 위에 버려졌으나 큰키나무는 나지 않고 들풀만 났다.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들풀은 뿌리가 깊지 않고 꽃도 아름답지 않다. 그렇지만 이슬과 물, 오래된 주검의 피와 살을 빨아들여 제각기 자신의 삶을 쟁취한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짓밝히고 베일 것이다. 죽어서 썩을 때까지. (중략)

나는 이 들풀이 죽고 썩는 날이 불같이 닥쳐오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생존한 적이 없는 것으로 될 것이며, 이는 실로 죽는 것, 썩는 것보다 휠씬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거라, 들풀이여, 나의 머리말과 함께!

<<들풀>>, <제목에 부쳐>(1924. 4. 26)

 

신해혁명 이후 루쉰은 정치적 방법이 아니라 문화혁명을 통해서 사회를 개혁하기 원했다. 특히 1925년 베이징여사대 사건 전후로 많은 글들을 쏟아내면서 그는 ‘정신계 전사’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해결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이 붙어 있었다. 항상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지만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것은 그가 개혁하고자 하는 세상 속에 ‘자신’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루쉰이 보여주는 모순의 언어, 모호한 삶의 방식은 바로 여기서 기원하고 있다. 그는 ‘암흑과 광명’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깊이 깨닫게 되면서, ‘암흑’ 속에 온전히 가라앉기를 선택한다. 루쉰에게 단 한 번의 선택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루쉰이 바라보는 ‘미래’ 혹은 ‘희망’은 스스로가 이러한 ‘절망’과 ‘죽음’에 던져져야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제 루쉰에게 ‘삶’은 그 자체가 ‘죽음’과 ‘부패’로 연결됩니다. <제목에 부쳐>에서 그는 ‘죽음을 기뻐한다’고 말하는데, 루쉰에게 죽음은 그 즉시 생명과 연결된다. 즉 그는 한 순간 자신을 규정했던 위치와 관념에 붙잡히지 않게 된다. 또한 그는 죽은 생명이 ‘썩었음에 기뻐한다’고 말한다. 루쉰이 보기에 썩고 부패하는 것은 생명 존재(삶)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썩고,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가 한 일들이 허공 속에 맴도는 실체 없는 메아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행위(삶)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루쉰은 이를 ‘공허하지 않다’고 말한다. 루쉰은 계속해서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죽음은 바로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루쉰은 계속해서 죽음이라는 거울을 통해 ‘삶(생명)의 의미’를 되새긴다. 아니 루쉰에게는 오로지 이 방법으로 사는 방법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음’을 극한으로 치닫게 하면서 ‘생명’을 더 구체적이고 실감하도록 한 것처럼, 루쉰은 자신을 깊은 ‘절망’ 속에 빠뜨리면서 도리어 그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다. 철저하게 절망하고, 죽을 때에야 생명과 희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루쉰이 자기를  더 철저히 해부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외침>> 이후 계속해서 써온 그의 글들은 모두가 하나의 ‘들풀’이었다. 그의 글들은 뿌리가 깊거나 아름답지 않지만, 생명의 흙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들풀은 살아있는 동안 짓밟히고 베이고 결국에 썩겠지만, 바로 그것이 들풀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루쉰이 생각하는 생명(삶)의 의미였다. 그에게 죽지 않고, 썩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과 같고, 그렇게 되면 모두 공허할 뿐이다.

 

5. 죽음, 생명 그리고 꿈

<<외침>>과 <<방황>>의 소설속 주인공들인 광인, 류웨이푸, 웨이롄수가 보여주었던 모호하고, 모순적인 태도 혹은 자기 부정적인 태도에 대한 해답은 <<들풀>>을 통해서 제시되는 것 같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들풀>>에 자주 나오는 꿈은 루쉰에게 ‘죽음=변화’와 같다. 그에게 꿈은 삶(생명)과는 전혀 상관 없는 공허한 놀음나 불가능한 일을 공상하는 것이 아니다. 꿈이란 그에게 화()할 수 있는 기회, 다르게 되는 것이고,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르게 된다는 것은 현재의 내가 ‘죽는 것’이고, 그것이 루쉰에게는 ‘생명’ 혹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법이다. 꿈 속에서 화()한 루쉰은 죽음처럼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불꽃같은 것이 번뜩이는 것’을 실감한다. 루쉰은 꿈을 통해서 절망과 죽음의 극한을 경험하고 여기에서 삶의 힘을 발견하는 것 같다.

 

그녀가 낱말 없는 언어를 말할 때에, 그녀의 위대하기가 석상과 같은, 그러나 이미 황폐해진, 무너지는 몸 전체가 떨리었다. 그 떨림은 비늘처럼 점점이 이어졌고, 비늘 하나하나가, 들끓는 물처럼 출렁였다. 허공도 즉각 함께 떨었다. 폭풍우 속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들풀>>, <무너지는 선의 떨림>(1925. 6. 29)

 

마지막으로 죽음과 생명은 루쉰에게 극한(limit), 무한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볼 때 더 잘 이해된다. 루쉰에게 ‘절망’은 본인이 말했듯이 새로운 시대에 자신이 도달할 수 없다는 깊이 있는 자기 직시이다. 루쉰은 그 한계(limit)를 너무나도 확신했다. 하지만 루쉰이 ‘절망’에 매몰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계속해서 움직여 간다는 뜻이다.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다가가는 점근선처럼. 루쉰 자신도 그 희망을 자신할 수 없다. 그 끝에 도달해본 적이 없고, 도달해본 사람을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쉰은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간다고 말할 수 있다. 출발은 절망이다. 그리고 루쉰은 자신을 포함하여 ‘식인사회’와 함께 철저하게 몰락하고자 한다. “내가 암흑 속에 가라앉을 때에, 세계가 온전히 자신에게 할 것”이라는 말. 

 

‘아이들’에게 희망을 두는 것은 그들이 한계(limit,극한, 무한)를 넘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그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루쉰에게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은 하나의 서로 다른 면일뿐이다. 그래서 루쉰은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2015.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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