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가 참 좋다.
소로우의 <월든>을 낭독하다보면 어느덧 긴장이 풀어지고, 의식의 가면이 사라진다. 나에게 <월든>은 단순히 자연이 좋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로 들리지 않는다. 자연의 일부로서 세계 그 자체와 연결되어 우주적 풍요로움을 감각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
니체는 19세기 유럽을 커다란 정신병원으로 보았다.
의식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항상 긴장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는게 좋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건 우리의 감각을 말라버리게 하는 작업일 뿐이다.
시대마다 우리는 다른 정신공간을 갖고 살았다.
지금과 다른 정신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과 다른 감각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전에 감각하지 못하던 구름, 호숫가의 소리, 개구리의 개굴개굴, 부엉이의 부엉부엉하는 소리를 감각하는 사람은 의식의 긴장이 문제되지 않는다. 다른 감각이 필요하다.
놀랍게도 소로우의 <월든>을 읽는 것만으로도 다른 감각이 솟구치는 듯하다. 마치 겨울을 지난 땅속에서 발아하면서 땅위로 솟아오르는 새싹들의 힘처럼 느껴진다. <월든>은 정신 속에 자연을 감각하게 해주는 텍스트인것 같다.
낭독하면서 읽었기에 이런 감각의 변화를 더욱더 느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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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도 상쾌한 저녁이다. 이런 때는 온몸이 하나의 감각기관이 되어 모든 땀구멍으로 기쁨을 들이마신다.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자연 속에서 이상하리만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날씨는 다소 싸늘한 데다 구름이 끼고 바람까지 불지만 셔츠만 입은 채 돌이 많은 호숫가를 거닐어본다. 특별히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없으나 모든 자연현상들이 그 어느때보다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196쪽)
나의 경험에 의할 것 같으면, 가장 감미롭고 다정한 교제, 가장 순수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교제는 자연물 가운데서 찾을 수 있겠다. ... 자연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감각기능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암담한 우울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 건강하고 순수한 사람의 귀에는 어떤 폭풍우도 '바람의 신'의 음악으로 들릴 뿐이다. 소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을 속된 슬픔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사계절을 벗 삼아 그 우정을 즐기는 동안에는 그 어떤 것도 삶을 짐스러운 것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199쪽)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속에, 또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진실로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友好)의 감정이었다.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여러가지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두번 다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 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며잏 느꼈다. 나는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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