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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소수적인' 문학과 소설의 종말

by 홍차영차 2024. 7. 10.

 

"사실 문학 자체가 본래적으로 소수적인 것이지 않은가?"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1883~1924) 논의를 따라가다보니 자연스레 '소설의 종말'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표현만이 우리에게 방법을 제공한다."라고 말하면서 카프카 스스로가 문학-기계, 표현-기계가 되었던 것도 '소설의 종말'관 연결해보면 자연스러운 귀착으로 보였다. 동물들이 주인공이지만 결코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소설, 내용보다는 표현 자체를 통해서 말하려는 카프카. 카프카는 왜 그렇게 다른 표현에 집착했을까?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밀란 쿤데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605년)를 소설의 기원으로 볼것이냐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년)를 첫번째 소설로 볼 것이냐와 상관없이 소설(novel, fiction)은 근대가 낳은 자식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양한 문학형식들이 있었지만 소설은 문자 사용이 보편화된 '거짓말이 일상이 된 사회'에 서 탄생했고, 전체적인 집단의식에서 벗어난 '자기인식'의 시대의 산물이다. 소설이란 말 자체가 바로 허구(fiction)이지 않은가.

문자가 발명된 이후로 중세까지 완전한 거짓, 완벽한 상상의 이야기란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말에는 여전히 힘이 있었고, 이야기들이란 대부분 자신이 경험한 것이나 전해들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마음을 갖게 되면서 완전히 허구적인 이야기들, 상상적 인물들과 사건들을 가지고 이성과 논리적인 기승전결의 서사를 가진 문학이 나타났다. 바로 소설!

소설이 시대적 산물로 나타났을 때에는 소설 역시도 '소수적인 문학'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적과 흑>(1830년)에 나오는 줄리앵 소렐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계급적 변화와 개인의 욕망을 잘 보여주었다.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에 나오는 프란츠와 테레자 역시 개인을 지탱하고 있던 모든 기둥들이 무너진 사회에서 개인의 모습을 잘 반영했다. 여전히 소설의 형식이 지금도 잘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상상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소설을 통해서 은유에 비친 현실을 발견하면서 공감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하지만 하지만 19세기를 지나면서 문자는 그 힘을 완전히 잃어갔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써도 현실에 변화를 일이킬 힘을 생산하지 못했다. 문학은 그저 문학(문자littera로 쓰인 이야기)이 되었다. 소설은 현실과 상관없는 그저 허구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게 바로 카프카가 맞이한 세계였다. 문자의 힘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글쓰기로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했던 카프카. 체코에 사는 유대인 그러면서도 독일어를 써야 하는 존재로서 카프카는 스스로를 문학-기계, 표현-기계로 구성하면서 새로운 문학을 발명(?)해 버렸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문학이 '소수적인 문학'으로서 재탄생하기를 바랐다. 표현-기계로서 자신만이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들도 작동하게 하는 글! 당연히 여기에는 카프카가 세계를 맞이하면서 느끼는 강도의 전달이 핵심이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카프카는 프루스트의 글쓰기, 예술적 기호로서의 글쓰기에서 본질을 발견하는 프루스트와 조우하게 된다.)

어떤 내용을 전달할 것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표현-기계로, 배치로서의 문학-기계로서 작동해야 한다. 어떻게 이 강도를 전달할 것인가? 쓰는 사람 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 역시 이 배치 속의 구성요소가 되어서 같이 굴러가게 작동할 것인가. 카프카의 문학은 그렇게 소수적인 문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송>을 읽으면서 읽는 사람 스스로가 느끼는 삶의 당혹감들,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계속되는 삶의 모습. <성>이나 <아메리카>를 보면 어디를 펴보든 갑작스러우면서도 우연스런 마주침 속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삶,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모습에서 이 작품들이 미완성인 것은 글을 마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칠 수 없기 때문에, 작품을 마무리해서는 전할 수 없는 강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들뢰즈/가타리는 문학-기계로서 카프카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다. 그런데 이러한 카프카의 문학은 클래식 음악에서 쇤베르크(1874~1951)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클래식 또한 근대에 탄생한 (이성의 논리구조, 문자적 형식인 악보, 조성으로 구성된) 음악형식이기 때문이고, 어쩌면 쇤베르크야말로 이러한 클래식 음악의 종말을 일으켜버린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쇤베르크 이전에 드뷔시같은 기존의 클래식 문법을 무시하면서 개인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한 작곡가도 있었다. 하지만 쇤베르크는 단순히 기존의 클래식 문법을 무시한다기보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들뢰즈/가타리식으로 말하자면 내용이 아니라 표현에 집중했던 작곡가다. 안타까운 점은 (12음 기법, 음렬이라는) 전혀 새로운 표현, 형식을을 보여준 쇤베르크의 음악을 다시 찾아서 듣는 일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온전하게 12음 기법으로 쓰여진 곡들(쇤베르크 피아노 모음곡 op.25)을 들으면 마치 카프카의 작품처럼 20세기 이후의 메마른 인간들과 정신세계를 적확하게 보여줌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곡들을 찾아듣고싶지는 않다. (12음 기법 이전에 혹은 12음이 혼합된 작품들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정화된 밤, 달에 홀린 삐에로 )

 

 

'소설의 종말'을 떠올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프카 이후의 문학가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카프카 이전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소설을 쓸 수 있다. 다만 질문해야한다. 이것은 소수적인 문학으로서 작동하는 기계인가? 또 다른 측면에서는 카프카와 다른 표현-기계로서 표현되고 있는가? 소설의 종말 이후에 문학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쇤베르크 이후의 클래식 음악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기억해야 할 것은 소설이라는 형식 역시 시대적 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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