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PS) 1,2,3장을 읽으면서 작성한 정리 및 메모
비표상적 사유로의 탐색
우선 책의 전체 구조를 살펴보자. ‘기호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1부는 제목 그대로 다양한 기호들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표상적 사유와 다른 사유의 이미지를 탐구한다. 처음 이 책이 나온 것은 1964년이지만 계속해서 다시 쓰면서 2부까지 늘어났다. 역자(이진경) 말대로 이 책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점점 더 증식해갔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이 쓰여진 기간을 보면 주저라고 할 수 있는 1968년의 <차이와 반복>부터 1980년의 <천 개의 고원>까지 연결되어 있다. 말 그대로 들뢰즈는 여러번에 걸친 ‘프루스트 읽기’를 통해서 지금과 다른 ‘사유의 방식’을 탐구하고 조명했다. 2부는 ‘문학기계’라는 제목을 갖고 있고 서문에 ‘기호들의 증식과 생산’이라고 쓰여져 있지만 1976년 전후를 보면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가 배치되 있다. 즉 무의식적 주체 혹은 욕망의 문제가 2부에서 나올 것임을 예상해볼 수 있다.
1953 <경험주의와 주체성> 흄
1962 <니체와 철학>
1963 <칸트의 비판철학>
1964~1976 <프루스트와 기호들>
1968 <차이와 반복>, <스피노자와 표현문제>
1969 <의미의 논리>
1972 <안티-오이디프스>
1975 <카프타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1980 <천 개의 고원>
1981 <감각의 논리>
1983 <시네마 1>
1985 <시네마 2>
1988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1991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2 <소진된 인간>
1장 기호의 유형 - 네 가지 유형의 기호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후 <잃어버린>)가 “어떤 배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어떤 배움의 과정일까? “프루스트에게서 마르탱빌의 종탑이나 뱅퇴유의 소악절은 어떤 추억도 어떤 과거의 소생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것들은 언제나 마들렌 과자나 베니스의 포석들보다도 우월할 것이다.”(20쪽) 종탑/소악절과 마들렌/포석들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한 들뢰즈의 말을 보면서 추측해보자.
마르탱빌 종탑이 마들렌보다 우월한 것은 종탑은 “어떤 추억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들렌은 콩브레에서 지닌 다양한 경험들과 추억들을 일으킨다. 조금 뒤에 나오겠지만 마들렌이나 종탑은 모두 ‘감각적인 기호들’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종탑이나 뱅퇴유의 소악절은 욕망과 상상 자체와 연결된 기호인 반면, 마들렌은 이전의 기억들을 포함하고 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이집트 학자'가 아닌 견습생은 없다. 나무들이 내뿜는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목수가 된다. 혹은 병의 기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의사가 된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모든 것은 기호를 방출하며 모든 것을 배우는 행위는 기호나 상형문자의 해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추억을 늘어놓은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호들을 배워나가는 과정 위에 건축되어 있다.”(23쪽)
들뢰즈는 ‘배움’의 문제를 다룬다고 했는데,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정보획득과 같은 배움이라기보다는 삶을 살아가는 것, 타자와 사물을 알아가고 관계맺는 배움이라고 봐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의 배움은 프루스트의 기억과 연결된다. <잃어버린>을 읽어보면 다양한 기억들이 나오고, 표상적인 사유, 의식적인 사유가 아닌 방식의 사유와 기호들이 다채로운 빛깔로 펼쳐진다.
1 사교계의 기호(현세적 기호) - 껍질만 있고 속은 비어 있는
<잃어버린>을 보면 사교계의 몸짓과 언어들은 일상적 삶과 괴리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는 기괴하게 느껴진다. 작은 살롱의 파티에서 각자는 ‘수많은 기호들’을 방출하면서 자신이 이곳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사교계만큼 “축소된 공간에서 빠른 속도로 많은 기호들을 방출하고 집결시키는 영역”은 없다.
사교계 기호의 특징은 “어떤 행위나 생각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귀족들이나 부르주아들의 살롱에서 사람들은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만의 기호를 만들어낸다. 코타르는 ‘재미있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기호’를 만들고, 베르뒤랭 부인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기호’를 만들어낸다. 또한 게르망트 부인은 언제나 ‘매력적인 기호’를 지니고 있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문자적 세계의 특성이자 공허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기쁨이나 슬픔, 안타까운 행동과 감정은 전혀 없고, ‘기호’들만이 방출된다. 화려한 껍질로 둘러쌓여 있지만 속은 텅 비어 있는 모습! 기호의 상투적인 면모와 공허함은 여기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기호들을 거치지 않는다면 배움을 불완전해지고 심지어 불가능하기조차 하다. 이 기호들은 텅 비어 있지만 일종이 “의례적인 완벽성”을 갖추도록 해준다. (들뢰즈는 사교계의 기호, 현세적 기호들이 공허하지만 이 기호들을 통과할 필요에 대해 말한다. 좀 더 생각해볼 부분이다.)
2 사랑의 기호 - 가능의 세계를 품고 있는 거짓의 기호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상대방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고, 그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27쪽)
사랑에는 모순이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계속해서 그 사람 속에 있는 세계를 펼쳐서 전개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애인 속에 있는 미지의 세계들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그녀가 내뿜는 기호들을 해석해 낼 수 없다.” “하지만 그 애인의 몸짓은 그것이 우리를 향한 것이고 우리에게 바쳐진 것일 때조차 여전히 우리가 배제되어 있는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30쪽)
사랑의 첫번째 법칙은 주관적이다. 프루스트의 사랑은 질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질투는 사랑보다 깊다. 질투는 기호를 파악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멀리까지 나아간다. 다만 “사랑의 기호는 사교계의 기호들과 다르다. 그것은 사유와 행위를 대신하는 텅 빈 기호가 아니다. 사랑의 기호들은 오로지 자기가 표현하는 것을 감추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의 기호들이다.”(31) “사랑의 기호들은 사교계의 기호들과 달라 피상적인 신경절적인 흥분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사랑의 기호들은 기호 해독을 하는 데 점점 더 깊이 파고들면서 생기는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 애인의 거짓말은 사랑의 상형문자이다. 사랑의 기호를 해석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의 해석자이다.” 32
사랑의 기호가 거짓의 기호라고 말했지만, 이 기호들은 텅 빈 기호가 아니다. 반대로 사랑의 기호는 무한한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 거짓이지만 이 거짓은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기름진 땅이기도 하다. 프루스트를 보면 무수히 많은 동성애의 모습이 나온다. 왜냐하면 마르셀의 입장에서 여성의 동성애, 알베르틴이 보여주는 ‘고모라의 세계’는 언제나 ‘배제되는 세계’, 즉 남자인 프루스트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내가 방금 상륙한 곳은 무시무시한 미지의 땅”이라는 말은 바로 배제성과 끝없는 탐구의 가능성을 뜻한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고통의 국면이 열리지만 이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탄생한다.
3 인상 혹은 감각적 성질의 세계
마들렌과 홍차, 포석, 종탑들, 뱅퇴유의 소악절, 세 그루의 나무, 풀 먹인 냅킨의 빳빳함, 숟가락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감각적 기호들을 탐구하면서 들뢰즈는 비표상적 세계의 가능성을 경험한다.
마르셀은 종탑들을 바라보면서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강제를 느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의사에게 펜을 빌려서 손에 잡히는 종이에 자신도 알 수 없는 글들을 써 내려갔다. 감각적 인상이란 마치 물 속에 넣으면 열려져서 갇혀 있던 형태가 드러나는 일본 종이인형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이 찾아온다. 신기한 것은 마르셀은 이 기호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사유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하지만 마르셀은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게으름 때문에 이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다.
감각적 기호들은 분명히 표상적인 사유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세 그루의 나무, 종탑, 뱅퇴유의 소악적 그 자체가 주는 강도들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 재현적 사유/ 비재현적사유, 감정- 신체의 변용) 하지만 들뢰즈는 감각적 성질이나 인상은 잘 해석되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충분한 기호가 아니라고 말한다. 감감적 성질은 특별한 기쁨을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충만하고 긍정적이며 즐거운 기호이지만, 그것들은 물질적인 기호이기 때문이다. (물질성?)
“마들렌의 맛은 내 앞에 콩브레가 되살아나게 했다. 그러나 왜 콩브레나 베니스의 이미지가, 그 감각을 체험한 두 순간에, 어떤 확신과 유사하면서도 별다른 근거 없이도 나에게 죽음에 무심해질 만큼의 충분한 기쁨을 주었을까?”(<되찾은 시간>)
—> 물질적 의미는 그것이 구현하는 관념적 본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4 예술의 세계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에서의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예술의 세계에서 기호들의 의미를 깨달은] 그때부터,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먼저 거쳐 온] 다른 세계들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감각적 기호들에 대해서 그렇다.”(37)
—>예술은 저마다의 자의적 기호에 묻은 때를 털어버려서, 감각적 기호들이 관념적 본질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스피노자의 인식종류를 떠올려보면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기본적인 인식단계는 ‘이게 마들렌이구나, 홍차구나’라는 1종인식 -> 해석 단계에서 마들렌을 먹으면서 콩브레를 떠올리는 해석단계 (2종인식) -> 예술의 단계는 우주적 진리, 본질을 알아보는 3종인식!
일단 예술의 단계는 이후에 좀 더 알아보게 될 듯. 중요한 점은 서로 다른 기호들이 서로 다른 세계들은 구성한다는 점!
'들뢰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PS] 정말 예술의 기호는 다른 모든 기호들보다 우월한가? (4) | 2024.05.02 |
---|---|
[PS] 들뢰즈는 왜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주목했을까 (0) | 2024.05.02 |
세계 끝의 버섯 (0) | 2023.12.14 |
<안티오이디푸스> 깊이 읽기 - 1강 (0) | 2020.01.20 |
다른 퇴근길(3) 퇴근길과 백수, 그 사잇길의 존재론 (0) | 2019.1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