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들뢰즈

[PS] 들뢰즈는 왜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주목했을까

by 홍차영차 2024. 5. 2.

 

들뢰즈는 왜 기호들에, 프루스트에 집착하는 걸까?

사실 처음 <프루스트와 기호들>(PS)를 보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뜬금없이 <잃어버린>에는 4가지 기호들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기준을 가지고 4가지 기호들에 대해서 말한다.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 기호, 예술 기호! -.-;

갑작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고, 뜬금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기호들은 모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여러번의 탐독을 통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보았길래 10년동안이나 계속해서 그의 소설을 다시 읽고 또 자신의 책을 쓰고 다시 쓰는 작업을 했을까?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지만 먼저 결론을 내려본다면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서 현재까지의 사유와 다른 방식의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한 듯하다. 비표상적 사유에 대한 탐색! 이런 질문은 <프루스트와 기호들> 이후 거의 마지막 저작까지 펼쳐져 있다. 생각해보면 그의 주저이자 박사학위인 <차이와 반복>은 비표상적 사유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우선이라는 것! 하반기에 살펴본 <의미의 논리> 역시 이러한 질문에 대한 아주 세밀한 논증들로 보인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비표상적 사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렇게 표상적 사유, 재현적 사유를 넘어선 다른 사유의 이미지에 집착할까? 들뢰즈의 가장 알려진 대표적 저작인 <천 개의 고원> 자체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실질적 적용 방법에 대한 설명서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윤리학!

들뢰즈가 반복해서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표상적 사유는 한 마디로 언어와 연결되어 있다. 언어가 생기면서 발생한 사유의 변화가 바로 표상적 사유였다.(일단 주장!)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거울을 얻는 것과 같다. 어떤 대상, 사물, 타자를 대하면서 언어라는 일종의 반사면을 갖게 되면, 그것 자체가 주는 감각, 그것 자체가 주는 차이를 표현하거나 감각하기 어렵다. 한 번 물리면 몇 분안에 죽을 수 있는 독사를 '뱀'이라고 표현하게 되면, 매끈매끈한 표면을 가지고 있고 쉭쉭 소리를 내며 물리면 죽는다는 그것 자체의 감응은 사라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언급하고 전달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뱀'이라는 언어를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다. 이제 뱀이라는 언어를 통해서는 그것 자체가 주는 감각과는 전혀 다른 감응 - 언어적 감응을 갖게 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분류되는 기호에서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는 정확이 이런 언어와 연결된 기호이다.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역시 그 기호에서 미끄러지는 부분들이 중요하다. (둘 다 일종의 속임수, 언어가 가진 왜곡과 오류의 특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들뢰즈가 관심갖는 것은 다른 두 가지 기호다. 왜냐하면 똑같은 기호라고 하지만 감각적 기호와 예술 기호는 비언어적인 감각들의 감응과 표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4, 5장을 보면 반복해서 "(비자발적) 기억에 의해 전개되는 감각적 기호들은, 진정 “예술의 발단”이며 우리를 “예술의 길로” 끌어들인다."고 말한다. 감각적 기호들이 예술의 기호로 가는 피할 수 없는 문처럼 표현된다. 일단 감각적 기호와 예술의 기호가 앞의 두가지와 달리 비언어적인 기호라는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즉 두 기호들은 표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온통 자신들만의 비밀언어처럼 작동한다. 사실 사교계의 기호들은 공허한 기호에 불과하다. 실제의 삶과 어떤 연관도 갖지 않는다. 도리어 실제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처음 게르망트 사교계에 들어온 마르셀은 그들의 기호를 오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는 그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형성된 일종의 고정된 기호, 표상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호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호를 파악하려면 대상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그 관계들을 파악해야 하며, 거기에서 언어 밑에 있는 의미들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감각적 기호는 다르다. 들뢰즈는 마르탱빌의 종탑이 마들렌과 홍차보다 우월하다고 말했다. 둘 다는 모두 똑같은 감각적 기호이자 비자발적 기억라고 할 수 있지만, 마르탱빌의 종탑은 어떤 기억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마르셀은 바로 마르탱빌 종탑을 보면서 이전에 경험을 통해서 다시 기억하는 표상적인 사유가 아닌 비표상적 사유의 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마들렌과 홍차는 이전에 콩브레에서의 표상적인 사유들을 통과하면서 비자발적인 기억과 마주친다.

들뢰즈는 책에서 이 둘 사이에 어떤 위계가 있다는 듯이 표현하지만 실제적인 면에서 보면 두 사건 모두 감각적 기호이고, 이 사건을 통해서 비표상적 사유를 찰나적으로 경험한다는 면에서는 동등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조금 더 확장해서 감각적 기호와 예술적 기호와의 위계 역시 역량의 차이라고 볼 수는 없다. 분면 감각적 기호와 예술적 기호는 모두 다른 사유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