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이디푸스> 지도 그리기, 시작!
"내가 생각하기에 <안티오이디푸스>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령 성애술(erotic art)이라는 말로 전달될 때의 의미에서 '술術(art)로 읽는 것이다. (중략) 감히 말하건대 <안티오이디푸스>는 윤리 책이며, 꽤나 오랜만에 프랑스에서 저술된 최초의 윤리 책이다." (푸코)
2019년 글쓰기강학원팀은 1년동안 <장자>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읽었다. 읽히지 않는 책을 가슴에 품고 1년을 가지고 다니다 보니, 아주 조금씩이지만 격하게 맞장구치는 구절을 만났고 조금씩의 체험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끝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1년전에 멋진 강의를 들려준 성기현샘을 모시고 다시 한번 들뢰즈/가타리를 탐구해보자는 실천이 이뤄졌다. "광화문보다 더 북쪽에서 왔어요."란 소리에 놀라자 다른 분은(정군?) "전 은평구에서..." 왔어요. 물론, 지리적 조건에서의 결정판은 전주에서 오신 풍경샘이었다. -.-; 들뢰즈가 유명한 건지, <안티오이디푸스>를 읽고 싶은 욕망인지 아니면, 노을처럼 성기현샘을 보고싶어서 온것인지 알수 없는 혼재된 욕망 속에서 그렇게 첫 강의가 시작됐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라깡을 비판하는 들뢰즈의 책을 읽으려고 하니 난감. 찬찬히 <안티오이디푸스>라는 제목부터 살펴보자. 들뢰즈의 주저인 <차이와 반복>,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에 느껴지듯이 들뢰즈의 텍스트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아니 들뢰즈/가타리는 ‘제목’으로 처음부터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안티오이디푸스’일까?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라고 서문을 적었던 푸코의 입을 빌려보면, 이 시대는(1945~1965) 올바르게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특정의 사유 방식, 특정 윤리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바로 마르크스주의 - 프로이트주의 - 구조주의!성기현샘이 이야기해주었듯이, 68혁명을 눈 앞에서 체험한 사람들에게 구조주의에 대해서 다시 말할 필요는 없었을 듯. 주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에 집중된 것 같다.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음에도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라 사회는 하부구조, 즉 생산양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생산양식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사회가 달라진다고 여겼다. “역사란 상이한 생산양식들의 역사이다.”라고.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즉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인류 역사를 다시 보자고 말한다. 사회 유형이란 생산양식보다 더 근원적인 ‘욕망’에 따라, 사회 구성원의 ‘욕망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이렇게 보면 우리가 욕망하고 있는 것들(자동차, 집, 옷, 시계, 가방)이 정말 내가 욕망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욕망까지도 관리당한다고 생각하면 쪼금 무섭기도 하다.
사회 구성이, 즉 지금의 자본주의가 생산 양식이 아니라 ‘욕망의 관리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라깡)이 살며시 포개진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가가 쟁점이 된다.
1장 ‘욕망 기계들’
책 제목과 마찬가지로 1장의 제목만 알면 (물론 ,그게 어렵다고 강사샘이 말하셨지만.. -.-;)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성기현샘의 말로 바꾸면 ‘흐름’과 ‘기계’라는 것만 알면 된다. 아...쉽다.(고 생각하자!)
“그것은 도처에서 가능하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라고 불러 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게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1장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 세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 무의식(욕망)은 단수가 아닌 복수이고, 정관사로 고정할 수 없는 부정관사이다. 한 마디로 욕망은 기계’들’이다. ‘~들’, 복수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기계들'라는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욕망은 겉잡을 수 없이 퍼지고, 팽창하고, 바뀐다. 변화, 변이 자체가 욕망의 특이성이다. 그런데, 이런 욕망은 아무런 마주침 없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웃항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변한다. 입은 그 자체로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입이 커피와 만나서 먹는-기계, 입-손이 만나서 키스-기계, 입-공기가 만나서 말하는 기계가 된다. (강의를 되돌려 생각해보니, 공기도 변하고, 커피도 항상 변하는 가운데 그 흐름을 절단하면서 기계가 된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계의 기계, 생산의 생산이라는 말을 썼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욕망, 기계가 합쳐서 구성되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조금은 이해되는 듯. 기계는 연결을 통해서 작동하고, 무엇과 만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달라질수 있다.
이외에 흥미로웠던 부분은 주체와 향유를 이야기하면서 하나의 주체는 ‘쾌락’ 속에서 형성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를 ‘독신 기계’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항시 변하고 이런 저런 욕망(무의식)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내가 ‘나’라고 느끼는 ‘주체(형성)’은 자기 성애적 쾌락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어떤 고정된 주체란 없다는 전제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이 아니고 '분열분석'! 얼음 위에 처음으로 올라간 사람이 여러번에 걸쳐서 얼음과 나와 스케이트와의 어떤 관계(내공, 강도량)을 구성하면서, 쾌락을 느낄 때 나는 하나의 주체가 된다. (“스케이트를 타는자, 그것은 나다.”)
그리고 이 주체생산에서 중요한 것은 망상이나 환각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 독신기계는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스케이트 타는 자”라는 실제적인 ‘강도’를 생산하고, 주체가 된다. 물론, 이는 매번마다 만나는 이웃항들에 따라 달라진다.
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 성가족이란 제목을 보면, 아직 읽지 못했지만 욕망에 대한 좀 더 정치한 분석이 나올 것 같다. 텍스트로 들어서면, 다시 막힌 벽처럼 느끼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티오이디푸스’에 대한 지도그리기가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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