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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가

by 홍차영차 2024. 1. 11.

 

"차를 좀 더 들겠니?" 3월 토끼가 열심히 권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요." 앨리스는 언짢은 투로 대꾸했다. "그러니 더 먹을 수는 없어요."

"덜 먹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 모자쟁이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먹은 것보다 더 먹는 건 아주 쉬워."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문학동네 89쪽)

"그렇다면 네가 뜻하는 그대로 말해야지." 3월 토끼가 말했다.

"그러고 있는걸요." 앨리스는 서둘러 대답했다. "적어도 - 적어도 내 뜻은 내가 말하는 그대로예요 - 그거나 그거나 똑같잖아요."

"전혀 똑같지 않아!" 모자쟁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먹는 것을 본다'라고 하나 '내가 보는 거승ㄹ 먹는다'라고 하나 똑같겠구나."

... "내가 구하는 것을 좋아한다'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구한다'나 똑같겠네."

"그렇다면," 겨울잠쥐가 잠결에 말하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난 잘 때숨쉰다나 난 숨쉴 때 잔다나 똑같겠네!" (83쪽)

앨리스는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그 광경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고양이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고양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건 그렇고, 아기는 어떻게 됐니?" 고양이가 말했다.

"돼지로 변했어." 앨리스는 고양이가 자연스레 돌아오기라도 한 듯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고양이는 말하고 다시 사라졌다. (78쪽)

 

 

들뢰즈는 루이스 캐럴을 비롯해서 프루스트, 디킨스, 베케트, 보르헤스까지 많은 문학작품들을 사랑하고, 그 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한다. (다른 말로 문학에서 발견한 철학) 그래서 2024년에는 '들뢰즈가 사랑한 작품들'을 많이 보려고 하는데 처음 시작한 것이 바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사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완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만화나 영화로 보기는 했어도 이렇게 문자로 적힌 책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미나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더 풍성했을텐데라는 마음이 든다. 읽어가면서 참 신기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뭔 소리인지, 들뢰즈는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더욱 더 궁금해졌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에서 특히, <의미의 논리>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많이 언급한다. 그리고 난해해 보이는 '언어론'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또 들뢰즈가 이 책을 워낙 많이 언급하기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이 정말 어른들을 위한 동화일까?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즐거움을 느낄까 혹은 무엇을 이해할까?

아마도 이 질문 자체는 어떤 선험적 전제를 깔고 있는 것 같다. 대체 '무엇은 이해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조금 더 들어가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쫌 더 들어가보면 '무엇'에 해당하는 단어와 사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아, 벌써 복잡해지는 것 같다. -.-;

<의미의 논리>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 처지라 들뢰즈의 언어에 대한 논의를 더 끌고 갈 수는 없다. 다만 들뢰즈는 이 책에서 '문자성'에 대한 반감, 내가 자주 언급한 '구술성과 문자성'의 딜레마, 문자성이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는 스타일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닐까?)

다음주에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을 텐데 어떤 당혹감을 줄지 기대된다.

참, 이 책은 어른들의 동화이기도 하지만 분명 아이들이 더 재미나게 읽을 것 같고, 더 잘 이해(?)할 것 같다. 벌써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논리가 무너지고, 규칙이 뒤박죽되고, 언어가 망가지는 것에 당황하고 화가나기도 하지만, 아마도 살아있는 신체성을 간직한 아이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주는 구술성을 이해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고 즐길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희곡을 쓸 수 없는 작가를 상상해 보라. 언어에 대한 감각이 너무 예민해져서 단어의 형식화를 방해받는 시인을 상상해 보라. 장황한 말들이 극단적으로 생략되어 무언극으로 전락한 <햄릿>을 상상해 보라. 언어가 그 용어의 두 의미 사이에서 소진되어 있는 상태를 상상해 보라. 그것은 모든 잠재적인 표현의 가능성이 실현되어 단어 속에 결빙되었지만, 그 결과 모든 잠재적인 화자들이 너무 피곤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이다.

이것이 바로 베케트의 후기 작품인 TV희곡인 <쿼드> <유령 트리오> <한갓 구름만> 그리고 <밤과 꿈>이다. 여기에는 언어가 전혀 없다. 여기서 언어는 기껏해야 소품을 묘사하는 목소리로 축소되거나, 최악의 경우 연극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몇 개의 지문으로 축소된다.

그렇지만 이 언어 혐오자는 문제에 부딪힌다.

장-자크 르세르클 <들뢰즈와 언어>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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