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상상은 내 맘대로'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상상은 내가 하고 싶은데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뭔 말인가 하면 내가 아무리 마음대로 상상한다고 해도 상상이란 자신의 패러다임, 지식체계의 한계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평생 조성음악만 들었던 (즉 조성 음악만 음악이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음악적 상상력은 언제나 조성음악이라는 패러다임 안에 갇히게 된다는 것.
슈만의 피아노 소품이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바그너의 음악극 그리고 쇤베르크의 무조 음악은 아무렇게나 생각하면서 그냥 나올 수 있는게 아니다. 상상의 한계를 뚫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과 새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혹은 자신의 감각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지금과 다른 생각, 다른 사고 방식, 다른 행동 양식은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지금과 전혀 다른 정신구조와 세계를 경험할 때 가능하다.
우리가 프루스트, 카프카, 버지니아 울프, 마르케스 그리고 보르헤스를 읽어야 할 이유다.
이중에서도 보르헤스는 단연 독보적이다. 세계, 온 우주가 '도서관'이라고 하지 않나, 지하실의 구멍에 우주가 있다고 하고, 일평생을 기억하는 존재를 묘사하기도 한다. 스스로 세계의 모든 사람이고,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단편들로 이뤄진 보르헤스의 문학은 한 마디로 '이해 불가능'이다. 기존의 지식 체계로, 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만을 경험했던 독자는 결코 보르헤스를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보르헤스는 이런 세계 저편에 있다.
한 편을 읽어도, 몇 편을 읽는다 하더라도 또 한 편을 여러번 읽는다고 나아지는 점은 없다.
어떻게 보면 이해 불가능성이야말로 보르헤스의 특징이다.
그럼 이해도 되지 않고 상상도 되지 않는 보르헤스를 왜 읽어야 하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의 나의 관습과 논리, 합리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보르헤스를 읽고 그에 대한 감응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견고했던 나의 상상력의 한계가 한 번에 깨지고 더 넓은 세계, 우주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더 넓은 세계와 마주한 나, 변화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더 넓은 세계란 더 풍부한 세계, 더욱 세밀한 감각적 세계를 말한다.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은, 상상의 경계가 커진다는 뜻이고 순간의 기쁨을 영원회귀적으로 경험한다는 뜻이다. 근대의 직선적 시간, 절대적 공간을 넘어서는 순환적 시간,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겨우 10편정도의 단편을 읽었을 뿐인데 나의 자아가 조각나고 파괴되면서 새로운 내가 형성되는 기분이다.
전집 <알렙> 2/3쯤을 읽고, 오늘부터 <픽션들>에서 두 편을 읽었다.
보르헤스를 읽고 나서 변화된 내가 기대된다.
푸코의 말대로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자기'의 모습이 상상된다.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프카의 예술론 (3) | 2024.09.22 |
---|---|
거울 나라의 앨리스와 언어 유희 (0) | 2024.01.17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가 (2) | 2024.01.11 |
헤르만 헤세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0) | 2021.08.12 |
싯다르타 (0) | 2021.08.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