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생뚱맞은 조합으로 낭독읽기를 하고 있다.
시와 양자역학
1시간 정도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읽고, 30분 정도는 현대시를 이것저것 읽는다. 시는 참여자인 미묘님이 읽고 있는 것들 중에서 골라서 함께 읽는데, 오늘은 서대경, 김소형의 시를 읽었다. 들어본 시인이라곤 김수영, 이상, 백석 정도인데 동시대인의 시를 읽는 기분이 묘했다.
신기한 것은 양자역학을 발견해가는 과정이 담기 <부분과 전체>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의 대화가 묘하게 시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뉴턴의 역학으로 살아 온것은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세상에 나온지 이제 겨울 100년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사실 양자역학은 눈에 보이지 않고, 언어적으로(수식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한 마디로 "있지만 없다 없지만 있다"라는 개념을 과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즉 이렇게 완전히 다른 차원, 다른 사유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킬 때는 (사유의 내용이 아닙니다) 시적이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전의 언어와 체계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대시를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시를 읽고 나서 나한테 어떤 정서의 덩어리가 생기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시인의 시를 계속 읽다보면 그 시인이 말하는 세계를 뭉게뭉게 확인하게 된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기괴한 논리의 과학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런 시적 상상력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시적 상상력을 '대충'이라는 부사와 연결시켜선 안된다. <부분과 전체>에서 아인슈타인이 언어 사용에 있어서 엄격했다고 하이젠베르크가 말하는 것처럼 시인들 역시도 자신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 엄격하니까.
시와 과학, 예술과 과학은 이제 하나다.
그래서 시와 양자역학 읽기가 더 흥미로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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