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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읽기

물질성의 콩브레 사회와 문자로만 사고하는 사교계

by 홍차영차 2021. 11. 6.

물질성의 콩브레 사회와 문자로만 사고하는 사교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내가 삶에서 욕망하는 것이 순전히 물질적인 것이었으며, 또한 나는 지성의 즐거움 없이도 얼마나 잘 견뎌냈던가!  …… “아닙니다, 선생님. 제게서 지성의 즐거움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미미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건 그런 즐거움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즐거움을 맛본 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걸요.” 253 쪽
… “그렇다네, 창녀와 결혼한 남자가 아닌가. 그의 아내와 만나기를 원치 않는 부인네들이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들의 뱀을 쉰 마리나 날마다 삼켜야 하는 모욕을 감수하고 있다네.” 이처럼 오래전부터 자기를 환대해 왔던 친구들의 손님에게 하는 베르고트의 악의적인 말투는 스완네 집에서 매 순간 그들과 함께 했던 그의 애정 어린 말투만큼이나 내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예를 들어 나의 고모할머니 같은 분은 베르고트가 스완에 대해 했던 것 같은 다정한 말들을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일부러 불쾌한 말을 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없는 곳에서는 설령 그들이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해도 불쾌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 콩브레 사회만큼 사교계와 닮지 않은 곳도 없었다. 스완네 가족은 이미 사교계를 향해, 그 변하기 쉬운 물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지금 한 말은 나와 자네만 아는 거라네.” 우리 집 문 앞에서 헤어지며 베르고트가 말했다. … 한편으로 그런 경우 내 고모할머니 같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되풀이하는 게 싫다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라고 답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비사교적인 사람들, 즉 ‘호전적인 사람들’의 대답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256~257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53~257)

 

18살부터 사교계에 드나들었다고 해서 프루스트를 ‘거짓말’에 능숙하고 음흉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프루스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의 ‘속마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꿰뚫었다. 그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 마음의 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까지  알고 싶었하는 천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관찰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천성과 관찰력을 사람들을 이용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이런 능력을 가지고 주변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고, 말하지 않는 문제들을 풀어주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나의 프루스트씨> 참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방출하는 무수히 많은 잉여들을 보여준다. 프루스트는 마음 속에서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누구보다도 더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이를 독창으로 표현했다. 그의 글을 읽고 있다 보면 간혹 내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지 ‘정신 분석 상담 사례집’을 읽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이렇게 관념과 의식의 흐름에 관심이 많고 민감하게 감각했다면, 프루스트-마르셀은 소설가 베르고트의 말처럼 관념에서 많은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분명 말하지만 프루스트는 관념들의 세계보다 ‘물질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었다. 이 장면에서도 나오지만 프루스트는 자신의 묘사들, 의식과 감정의 흐름들을 아주 신체적인 것으로 표현한다. 프루스트에게 기억은 지나간 것의 ‘정보들’을 재조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감정은 그 순간 자기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할 수 있지만 분명하게 신체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었을 때, - 바로 이 순간에 자신의 신체적인 상태는 레오니 고모집에서 먹었던 상태들과 동일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을 풍부하게 다시 돌이켜볼 수 있게 된다. 아니다. 홍차와 마들렌을 먹었을 때, 마르셀이 느꼈던 감정을 감상적인 회상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 그에게 기억이란 추억을 회상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에서 충만하게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그 집사가 질베르트가 외출 중이라고 말해서가 아니라 집사가 말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도련님, 아가씨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제가 도련님께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걸 맹세할 수 있습니다. 도련님께서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하녀를 불러 드릴 수도 있습니다. 도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라면 제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도련님도 잘 아실겁니다. 아가씨께서 집에 계셨다면, 당장 도련님을 아가씨 곁으로 모셨을 겁니다.” 이 말이, 우리가 연구해서 하는 연설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현실을 적어도 대략적으로나마 엑스레이 사진처럼 드러나게 해 주는 비의도적인 말이라는 점에서는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말이, 내가 질베르트 주변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걸 말해 주었다. 집사가 그 말을 하자마자 내 마음에는 금세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서 난 질베르트 대신 집사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내 여자 친구에게 가질 수 있는 모든 분노의 감정을 집사에게 집중했다. 집사의 말 덕분에 질베르트에 대한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난 내게 이제는 사랑만이 존재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82~283)

 

프루스트는 문학으로 자신을 표현했지만, 그는 말의 내용이나 말 자체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이나 그 말을 하면서 방출되는 다양한 잉여들 - 표정, 눈빛, 손동작, 숨소리, 발걸음, 떨림 - 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체의 힘의지가 떠오른다.)

프루스트의 생애 마지막 8년간을 한 집에서 보낸 셀레스트는 프루스트가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한다. 프루스트는 사람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을 포함해서) 너무 바닥까지 캐내기 때문이다. 캐냈다기보다는 그의 눈에는 무언가가 계속해서 보였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분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신이 캐낸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흐름, 감정의 전환 그리고 무수한 잉여들의 모음집처럼 보인다. 특히 그는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다른 속마음, 무수한 거짓말들의 향연을 경험했다. 20여년간의 사교계 생활! 그에게 사교계는 아마도 이런 감정 분석의 교과서이자 실습장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교계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러한 의식의 흐름을 아주 적나라게 볼 수 있는 현장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프루스트는 자신의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외부로부터, 특히 사교계로부터 고립시켰다. 필요할 때만, 책을 쓰면서 다시 ‘현장’을 찾을 필요가 있을 때에만 사교계를 갔고, 친구들을 만났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이유는 속마음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사회에 절망하라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기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선 프루스트는 반대로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되지 않는 사물 자체, 인간 자체, 삶 자체의 아름다움을 말해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지성인처럼 보이지만 오로지 정보로서의 관념, 문자로만 소통하는 사교계 사람들, 자신의 해석이 아니라 누군가의 해석으로만 말하는 사람들을 전시하면서 ‘잃어버린 신체성’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물질 그 자체, 신체 그 자체로부터 오는 것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그는 우리가 가진 속마음의 능력(?), 이성을 덕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잉여들로만 소통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직설적이며 비사교적인 방식, 즉 호전적인 방식으로 말하자고 고집부리지 않는다. 잉여를 감각할 수 있는 신체의 능력을 회복하면서, 또한 이성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면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마지막 부분은 책의 마지막 권인 ‘되찾은 시간’을 읽고 나야 알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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