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이 주는 풍요로움
: 조르주 바타이유, <저주의 몫>
희생된 포로의 몸도 전사의 것이다. 그는 그 몸을 집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를 소금이나 고추 이외의 다름 양념을 치지 않고 불에 구워 축제 동안 먹는다. 하지만 그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그를 데려온 전사가 아니라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전사는 그 제물을 아들, 또다른 하나의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에다. 축제의 끝에 이르면 전사는 제물의 머리를 손에 들고 춤을 춘다. 95쪽
멕시코인들의 전쟁과 제의에서 보여주는 너무나 잔혹해보이는 행위들은 바로 ‘공동체적 감성’을 각인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집단의식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멕시코전사 역시 생명을 죽이는 행위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문자 이후에 정신이 발명되었다고 해도 자아, 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 혹은 제의를 통해서 공통적인 감성을 형성하는 것이 종족 전체와 내가 살아가는데 필수적이었기에 이런 주기적인 소모/파괴의 행위들로서 이런 축제/광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포틀래치-타자들을 위한 소모 행위-를 통해 소모된 부는 타자가 그 부에 의해 변화되었을 때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소모행위는 고독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독한 소모는 완성이 아니며, 소모는 타자에게 작용할 때 완성된다. 잃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증여의 진정한 힘은 그것이 타자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에 달려 있다. (<저주의 몫> 113쪽)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이라는 증여에는 피할 수 없는 모호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함, 근대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해를 넘어서는 감성의 구성(교환)이 바로 여기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표현이 이성적인 말이 아니라 잉여적인 소모들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처럼.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논리학이 아니라 공통감성을 통해서 가능하다. 똑같은 물푸레나무를 보고 한 종족은 두려움에 떨고, 다른 종족은 기쁨의 춤을 준다. 이러한 감성의 형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감성은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경험의 공유 혹은 공통적인 질문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가능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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