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으로서의 진리와 객관성으로서의 진리
: 마르셀 에나프, <진리의 가격>
진리의 가격?
<진리의 가격>의 저자 마르셀 에나프는 은유로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진리의 가격”을 살펴보고 싶다고 말한다. 어떻게 “진리의 가격”이 증여, 선물, 화폐가 연결될지 흥미를 가지고 살펴보았다. 하지만 ‘소피스트와 돈’로 시작한 책이 ‘정정당당한 소피스트’로 끝날 때까지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진리의 가격과 선물이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가? 진리의 가격은 얼마란 말인가?
정신의 발견 이후, 공동체와 증여
책의 초반부와 마지막을 다시 읽으면서 이 ‘진리의 가격’이 ‘개인(정신)의 발견’ 이후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라는 문제제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신의 발견’ 이후에 스스로를 새로운 그리스 영웅 - 아킬레우스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는 이성이라는 합리적 사고를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호메로스적 인간이 집단의식과 신화로 자신의 자아를 구성하면서 공동체를 이뤄냈다면, 소크라테스는 이성 = 덕 = 행복이라는 등식을 제시하면서, 문자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신화적 사고에서 풀려버린 본능을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제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니 호메로스적 인간을 넘어서서 더 고귀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선동했다.
마르셀 에나프는 동일한 방식으로 선물과 증여가 ‘정신의 발견’ 이후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 같다. 정확히 동일한 시대에 벌어진 진리(aletheia))와 독사(doxz)에 관한 대비를 통해서.
해석의 세계와 객관성의 세계
선물과 증여의 세계에서 왜 상품교환이 지배하는 세계로 바뀌었을까? 이는 어떻게 ‘해석으로서의 진리에서 객관성으로서의 진리’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에 다름없다. 우선 이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을 증명의 필요성에 있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시대에는 ‘해석으로서의 진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신탁, 점성술, 계시, 지혜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진리였다. 그것이 분명 하나의 (의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해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 권위에 힘입어 증명을 요구받지 않았다. 하지만 ‘객관성으로서의 진리’는 언제나 증명을 요구받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진리’임을 증명해야 한다. 점점 더 증명 방식은 이성적, 합리적, 과학적이기를 요구받았던 것 같다. 객관성의 세계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이전의 공동체보다 넓은 조직을 이해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
해석에서 객관성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하고, 애매한 것,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의 배제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이를 간단하게 (이게 가능할까?) 악기를 조율할 때 사용하는 순정율과 평균율을 예를 들어 이야기해보자. 순정율은 자연적으로 울리는 소리 자체를 가지고 조율을 하는 것이다. ‘도’라는 음을 치면 도라는 음에는 사실 12음이 다 들어가 있다. 귀 기울여 잘 들어보면 ‘도’라는 음정에서 솔이나 미를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도-솔, 도-미-솔을 누를 때 이것이 화음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공명하고 있는 음들이기에 그것 자체가 진리임을 신체로 알 수 있다. 하지만 평균율에서는 이런 그것 자체의 화음을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평균율이란 서양음악에서 12음을 똑같은 간격으로 나누어서 조율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12음을 동일하게 나누었기 때문에 전조가 편하고, 서로 다른 악기들이 음을 맞추기 쉬워진다. 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율된 악기는 서로 아주 미세하게 (1Hz이하) 차이를 갖고 있다. 즉 평균율로 조율된 소리는 신체적으로 이것이 공명되는 화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평균율에서 서로간의 화음 혹은 으뜸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일부러 각각의 조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모험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협화음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해석으로서의 진리’에서 ‘객관성으로의 진리’로 바뀐 세상이 바로 순정율에서 평균율로 바뀐 것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이전에 진리는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진리는 그것 자체로 자신의 충만함을 드러내며, 신체 자체로 느낄 수 있는 방식이었기에 증명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객관성의 세계’는 단어, 관념들의 추상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기에, 자신이 ‘진리’임을 이성적 논증으로 증명해야만 했다.
시집 한 권과 공산품은 같은 저울에 놓을 수 있을까
마르셀 에나프가 말했듯이 이렇게 세계가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시집 한 권과 공산품을 같은 저울”에 놓기를 주저하는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성의 세계가 ‘진리’라고 수백년에 걸쳐 말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리적으로 알고 있다. 진리는 언제나 내 신체와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이 진리가 본질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완벽한 논증을 통해서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 이성적인 사과를 받았지만 풀리지 않는 분노, 화폐적 가치로 더 많은 배상을 받았음에도 회복되지 않는 어떤 것들의 존재들. 이것을 진리라고 부르던, 영(hau)라고 부르던 우리는 알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객관성의 세계가 되었다는 말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 상업가치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 즉 보이지 않고 표현되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잉여들에 대한 배제를 포함한다.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객관성의 진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런 보이지 않고, 표현되지 않는 잉여들, 모호한 것들을 살려낼 수 있을까? (사실 바로 이 잉여들이야말로 마르셀 에나프가 마지막 부분에 소설에서 언급한 인생의 가치가 아닐까?) 이분법적 사고의 몰락, 모호한 것들의 인정이 필요하다.
세상은 단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리의 가격은 얼마인가? 진리를 전할 수 있는가? 객관성의 세계에 존재하는 진리에 가격을 매기는 것은 아주 쉽다. 여기서 가격이란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눈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가격인가 보답인가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해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지만 자신의 신체로 드러나는 만큼 (귀하면 귀한 만큼, 천하면 천한 만큼 - 물론 그 기준과 근거도 신체적 충만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보답/가격을 매기면 된다.
하지만 세상은 단어로, 관념으로, 가격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객관성의 세계에서 본능에 대한 제어를 통해서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자화, 개념화, 추상화가 너무 깊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세계를 ‘단어’로 바라보는 것 같다. 우리는 소통한다고 말하지만 그저 단어들만이 허공 위를 가로지를 뿐이다. 그 사람의 심정이 어떤지, 맥락과 상황을 살펴보지 않는다. 다시 신체로, 물질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바라보면 내가 하는 행위를 ‘의례적 증여인가 상호인정의 증여’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 두 부분이 같은 층(layer)에 있는지 다른 층에 각자 존재하는지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객관성의 세계에서 가격으로, 상업 가치로 평가되지 않는 모호함의 세계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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