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스 에로티카ars erotica에서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scientia sexualis로의 이행
: <성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
사유의 잡동사니처럼 보였던 <성의 역사> 1권이 푸코 사상의 보물상자가 되었다. 여기엔 없는 게 없다. “가족과 나란히 학교나 정신병원(53쪽)”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규율권력이 떠오르고, “어떤 형태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담론을 따라 권력이 가장 미묘하고 가장 개인적인 행동에까지 이르는가(19쪽)”라는 물음에서는 미시-권력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부로서의 인구, 노동력이나 노동 역량으로서의 인구(31쪽)”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통치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르스 에로티카와 대립시키면서 설명하는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scientia sexualis)(3장)에서는 1976년 이후 푸코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로서 탐구되는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이 떠올랐다. 아르스 에로티카에서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는 마치 자기배려에서 자기 인식으로의 이행에 대한 성담론 버전으로 읽혔다.
정말로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는 아르스 에로티카와 전적으로 대립하는가
푸코는 분명히 우리 문명은 “성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입문의 기술 및 스승에 의해 전수되는 비밀(아르스 에로티카)과 전적으로 대립적인 권력-지식의 형태(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65쪽)”를 발전시켜왔다고 말한다. 요컨대 우리 사회는 ‘아르스 에로티카’의 전통과 결별함으로써,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를 갖추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르스 에로티카의 사회와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가 작동하는 사회는 어떻게 다른가?
쾌락은 무엇보다도 먼저 쾌락 자체와 관련하여, 쾌락으로서, 따라서 쾌락의 강도, 쾌락의 특별한 속성, 쾌락의 지속기간, 육체와 영혼에 미치는 쾌락의 반향에 따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성의 역사1권>, 65쪽)
우선 아르스 에로티카를 갖춘 사회에서 진실이란 ‘실천’으로 간주되고 오로지 ‘경험’으로 얻어지는 쾌락 자체로부터 도출된다. 아마도 이런 실천과 경험을 보충하는 지식(말, 담론)은 당연히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신체에 대한 본성과 그로부터 따라오는 특성들을 잘 파악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행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스승만이 알려줄 수 있고, 비의적 방식으로만 이 기술을 전할 수 있을 뿐이다. 아르스 에로티카는 단순한 성애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통제의 기술이고, 자기를 구성하면서 타자까지도 통치할 수 있는 일종의 윤리학이었던 것 같다.
반면 보편적 기술과 제도로 등장한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방식은 ‘고백’이다. 사실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성과학, 성학문)라는 말 자체를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고백은 서양에서 진실을 생상하는 가장 훌륭한 기술이 되었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고백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성의 역사> 2, 3, 4권에서 보았듯이 이를 위한 세부적인 절차와 장치들이 점점 더 복합적으로 형성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고백하고, 자신의 과거와 몽상을 고백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고, 자신의 질병과 빈곤을 고백하고, 누구나 가장 말하기 어려운 것을 최대로 정확하게 말하려고 열심이고, 누구나 자신의 부모, 교육자, 의사,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고백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고백은 기쁨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만이 볼 수 있을 뿐인 글로 쓰이고 한다. 누구나 고백한다. 아니 누구나 고백을 강요당한다. (<성의 역사1권>, 65쪽)
정말로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는 아르스 에로티카와 전적으로 대립하는가? 한편에서는 맞고 또 한편에서는 틀리다. 왜냐하면 성적인 것의 과학(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에서 아르스 에로티카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푸코는 기독교적 고해, 특히 영성 지도와 자기 성찰, 영적 합일과 신에 대한 사랑의 추구에서 ‘성애의 기술’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스승에 대한 의존, 육체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험 등등. 잠정적으로 푸코는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가 아르스 에로티카의 특별히 미묘한 형태이고, 사라진 듯한 전통의 아주 세련된 서양적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82쪽)
푸코는 이러한 가정에 대한 확인을 위해 저 멀리 그리스 로마까지 다녀와야하는 고단한 길을 감행했다. 그리고 <성의 역사> 2권을 쾌락의 활용이라고 명명했다. 다양한 방식의 성적 행동에서 윤리적 실체로 인식되는 것을 파악하게 해주는 아프로디지아Aphrodisia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는 일종의 단절이 있지만 아르스 에로티카가 담당했던 자기 통제의 기술, 윤리적 주체를 구성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르스 에로티카 -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 &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 - 자기 인식(ghothi seauton)
아르스 에로티카에서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로의 이행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자기 배려에서 자기 인식으로의 이행이 떠오른다.
기원전 4세기에 쓰여진 <알키비아데스> 분석에서 나오는 자기 배려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자기 배려는 소수의 지배 계층들이 젊었을 때 향후 정치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특권이자 교육이자 수행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원후에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소수가 아닌 전체, 젊었을 때만이 아니라 전생애에 걸쳐 요구되는 자기 기술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의 한 부분으로 존재했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순간이라고 부르는 시기를 거치면서 자기 배려는 사라지고 자기 인식이 지배적이게 된다.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차이를 아르스 에로티카와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의 차이로 비교해봐도 좋을 것 같다. 자기 배려와 아르스 에로티카는 실천(자기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실험하고 어느정도까지 자기 통제가 가능한지를 다양한 자기 기술을 가지고 수행하면서 자기를 구축한다. 반면 자기 인식과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는 실천을 행하는 주체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주로 지식, 말, 담론만으로 진실에 접근 가능하다는 생각한다.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의 주된 형식이자 가장 중요한 방식이 고백/고해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인식을 말로 고백하고, 문자로 기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세부적인 절차들과 장치들이 점차적으로 중요해진다.
어릴 때부터 중국, 인도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자기 통제의 최고의 기술이 ‘성애의 기술’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육체적 쾌락을 얻기 위한 멋진 명분을 만들어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텍스트들이 전해지고 있음을 보면 단순한 쾌락 탐구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푸코가 탐구한 <성의 역사>를 보면서 조금 더 이해가 되었다. 분명 아르스 에로티카와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 이외에도 자기를 구성하는 다른 기술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성애의 기술이란 아주 개인적인 사생활과 가족과 관련된 자기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면서, 또한 국가 공동체를 이루는 인구의 문제에서도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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