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2017.11.18(토) 문탁네트워크 <마을교육워크숍>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다른 형태의 학교, 파지스쿨론
2014년 가을 문탁네트워크는 <파지스쿨>이라는 작은학교를 열었다. 일주일에 두 번만 오는 학교, 교육을 하지 않는 학교, 배운 것을 가르친다는 학교! 하지만 이런 문구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작은 규모이지만 3년동안 작동했던 <파지스쿨>은 올해 정원(?) 미달로 학교 문을 열지 못했다.
학생들이 오지 않았으니 이대로 문을 닫아야 할까? <열일곱인생학교>와 진행했던 마을교육 1, 2차 포럼의 열기를 떠올려보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과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7년 문탁네트워크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10대 친구들이 공부하고 기웃거리고 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이런 고민을 가지고 우리는 올해 <파지스쿨>을 잘 알고 있으면서 현재 청소년 교육 현장에 있는 네 분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분들의 대답은 한 마디로 “<파지스쿨>은 학생에게도, 학부모에게도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말이었다. 학부모들 입장에서 인문학공부는 매력적이지만, 일주일에 이틀밖에 책임지지 않는 학교, 최소한의 교과(국/영/수)를 하지 않는 학교는 끌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아이들에게 이틀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지 모르겠지만, 빡센 공부를 담보로 하는 인문학 수업(글쓰기/읽기)은 두려운 것이었다. 학교가 싫어서 학교를 나왔는데,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파지스쿨>에 오는 친구들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상호작용의 최소규모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1
분명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모순적 요구가 들어있다. 새로운 학교와 다른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규율적’ 근대학교에 대한 표상과 ‘자유와 감성’으로 대표되는 탈근대적 학교의 표상이 혼재되어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학교란 무엇인가?
본디 일과 공부는 분리되지 않았고, 다양한 연령층이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성장하고 살아간다는 생각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변해갔을까? 학교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답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파지스쿨>이 넘고자 했던 학교
학교가 망했다고 말하지만 ‘개념으로의 학교’가 없었던 적은 없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다양한 방식의 학교가 존재했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에피쿠로스의 정원, 공자스쿨, 조선시대의 서원, 향교, 서당까지.
문탁네트워크에서 <파지스쿨>을 열었던 것은 학교 그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었다. ‘제도화된 학교’를 넘어보자는 시도였다. 일리치는 제도화된 학교를 ‘학교화schooled’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어떤 과정을 이수하면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믿게 만드는 학교형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는 ‘구조화된 구조이면서 구조화하는 구조’(부르디외)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학교가 ‘학교화’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근대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로 획일적이며 ‘균질화된 다수’의 노동력 공급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분업화된 공장 시대에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규율에 순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각자의 고유성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존재이고, 세상에는 다양한 친구들이 있다. 래퍼가 되고 싶은 친구, 글을 쓰고 싶은 친구, 춤만 추고 싶다는 친구…… 이런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똑같은 생각과 삶의 양식을 강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신화가 필요해졌다. 다수의 예비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과정을 통과하는 것으로 배웠다고 믿게 하는 학교, 종교를 대신하여 학교는 근대의 신화이자 통과의례가 되었다. 하지만 일리치가 말한대로 ‘이렇게 길고 지루한 방식으로 신화가 만들어지는 사회’는 없었다.
근대의 학교가 제도화된 데에 여러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학교의 목적은 규칙과 제도에 순응하는 개인의 양산에 있다. 왜냐하면 근대 질서는 분명 국가, 학교,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권력장치를 통해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일이라는 공적인 영역은 회사(국가)가, 삶이라는 사적 영역은 가족이 담당했다. 이제 남은 것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중간에 존재하는 청소년들이다. 훌륭한 노동자로 사회에 나오기 전까지 이들을 맡아줘야할 곳이 필요했다. 이렇게 근대사회는 청소년들을 일과 분리시켜 오로지 배우는 것으로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것으로만 존재하게 만들었다. 청소년들은 학교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감금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제도로서의 학교를 넘는다는 것은 결국 일과 공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나눴던 이분화된 근대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2
<파지스쿨> 1기 민정이는 학교가 싫어서, 숨만 쉬고 다녔던 고등학교에 지쳐서 휴학을 하고 <파지스쿨>에 찾아왔다. 왕복 4시간의 거리와 처음 접한 인문학 공부가 힘들었다고 하지만 민정이는 <파지스쿨>에서 공부하면서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 볼 수 있는 힘을 얻었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1년 뒤 인터뷰에서 만난 민정이가 자랑한 것은 크게 오른 성적이었지만 민정이는 <파지스쿨>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경험한 것 같다. (2016년 <파지스쿨> 홍보 인터뷰 요약)
현상만 보면 제도로서의 학교란 “특정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며 의무적인 교육과정에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와 관련된 과정”(일리치)이다. 교사와 관련된 부분은 지난 시간에 다루었기에, 학교론에서는 ‘전일제 출석’과 ‘특정 연령층’으로 구성된 제도로서의 학교형태를 넘어보려는 실험으로서 <파지스쿨>을 살펴보려고 한다.
2. <파지스쿨> 1.0
일주일에 이틀만 나오는 학교
<파지스쿨>을 시작할 때 우리는 부정의 방식으로 출발했다. 연령분화가 아니라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함께 공부하고, 전일제수업이 아니라 일주일에 이틀만 나오며, 교사-학생의 이분법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공부해보자.
우리는 <파지스쿨> 이전에 여러 프로그램에서 청소년들과 만났다. 여기에는 일반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다수였고, 소수의 학교밖 청소년들이 함께했다. (불과 수 년 사이에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12주 정도의 짧은 시간으로는 우리들이 문탁에서 느꼈던 공부의 기쁨, 일이 공부가 되고 공부가 일이 되는 방식의 삶을 경험하기 어려웠다. 또한 이같은 의도와 달리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청소년들은 (교육) 서비스를 받는(구매하는) 소비자의 위치를 벗어나기 어려운 배치였다.
다른 삶이란 결국 기존의 방식과 다른 관계 맺음이어야 했다. 우선 공부의 밀도가 단기 프로그램보다 높아질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고, 주 2회 이상은 문탁에 나와 공부하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1년은(1+1년?)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파지스쿨>은 주 이틀 4블럭의 학교로 만들어졌다.
인문학 텍스트를 읽고 쓰면서 생각하고, 정답(正答)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해답(解答)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을 갖기를 바랐다. 이는 단순한 바람이나 추상이 아니라 문탁네트워크의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능했다면 10대, 20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공부론’ 발표에서 공부를 ‘문턱을 넘는 것’, ‘자기가 내는 언어의 길’이라고 표현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N프로젝트는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프로젝트형 수업’이 아니었다. 공부하면서 배운 것을 가지고 10대의 삶을 생산하고,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10대 영화감독, 셰프, 미술가, 목수로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적어도 주 2회는 나와서 공부하고, 그러면서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보면 그 이외의 시간에도 나와서 친구들끼리 뭔가를 만들고 쿵짝 쿵짝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하면서 봄날길쌈방을 만들고, 담쟁이베이커리를 만들고, 월든더치커피를 만들었던 것처럼. 하지만 3년을 거쳤음에도 N프로젝트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왜일까?
마을교사조차도 N프로젝트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잘 알지 못했고, 아이들 역시 하고 싶은 것을 알지 못했다. 결국 N프로젝트는 수업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매년 길을 잃고 헤메기 일쑤였다. N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수업에서만 만나서는 불가능했다. 공부하고, 밥을 먹고, 수다떨면서 놀고, 공간 청소를 하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 때 서로의 공통감각이 맞춰지고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파지스쿨> 3기 수아는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와 덥석 방을 계약하고 <파지스쿨>에 입학했다. 수아 이전에 <파지스쿨>을 자신의 생활권으로 삼았던 녀석은 없었다. 수아는 일주일 내내 문탁 사람들과 생활을 공유해야 했다. 좋든 싫든 매일 매일 점심을 함께 먹어야 했고, 혼자 자취를 하고 있으니 문탁의 모든 사람들이 수아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을교사와 문탁 사람들은 수아가 화, 목 이외에 삶을 어떻게 구성하면 좋을까 함께 고민해야 했다. 2016년 수아는 관심있던 베이커리를 자신의 N프로젝트로 추진했고, 담쟁이베이커리에 견습생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7년 현재 담쟁이베이커리는 수아가 문탁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하나의 축이 되었고, “가장 비학교화된” 공부가 되고 있다. 지금 수아가 문탁에서 활동하는 방식이 바로 전일제 학교를 깨고 자기 삶을 구성하는 모습이 아닐까. 3
이것이 우리가 ‘파지스쿨방’을 만들면서 상상했던 모습이다. 40대, 50대가 바글바글한 곳에서 10대들이 머물 곳, 그들만의 아지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수아가 파지스쿨방에 붙박이로 지내게 되면서 사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문탁에서 따로 따로 돌아다니던 10대가 그들끼리 뭔가를 해보려는 기미가 생겼다. ‘길위의인문학’으로 접속한 해은이, 문탁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는 했지만 그 어떤 문탁 활동에도 질색하던 새은이가 합류했다. 자신이 속한 세미나 시간 외에 만나기 어렵던 친구들이 일주일에 며칠씩 문탁에서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뭉쳐다니기 시작했다. 함께 노래방도 가고, 밀양 할매들을 만나고, 청송에 내려가서 춤을 배우더니 언제부터인가 이반 일리치의 <학교없는사회> 세미나를 하고, 난데 없이 스웨덴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파지스쿨방을 넘어서 기숙사를 마련해야 되는 건 아닐까? 공부를 통해 삶을 바꿔보겠다는 친구들을 전국에서 모아야 되는 것 같다. 문탁 전체를 생활권으로 삼을 수 있는 배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수아와 우현이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
지난 마을교육워크숍 1차 토론에서 <파지스쿨> 졸업생 동은이는 이렇게 질문했다. “왜 문탁 사람들은 나보다 더 나(청소년/청년)를 걱정할까?” 담쟁이샘의 대답은 파지스쿨이 변화하고자 하는 방향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다. “특별히 동은, 수아를 걱정한다기보다 지속해서 공부를 하다보니 내 문제에서 벗어나 주변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존재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 같다.”
다른 연령을 섞거나 비슷한 연령을 묶거나
연령의 구분을 없애자고 했던 <파지스쿨>은 출발부터 모순에 빠진 듯 했다. 연령의 구분을 없애자고 하면서 <파지스쿨>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으로 입학연령을 한정지었다. 모든 연령을 섞자는 말인가 아니면 비슷한 연령으로 묶자는 말인가?
일단 <파지스쿨>에서 연령을 섞자고 했던 것은 학령이 동일 연령으로 되는 것에 대한 반대였다. <아동의 탄생>(필립 아리에스)을 보면 근대 학교에서 같은 학년이 같은 나이로 구성된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점점 더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많아지자 아이들을 좀 더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학령=연령의 방식으로 나누었을 뿐이다.
또한 서로 다른 연령이 함께 공부하는 것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것 같다. 서로 다른 연령이 섞일 때 경쟁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협력의 기회가 많아진다. 또한 다른 연령들이 함께 공부하고 활동할 때 위계의 문제에 대해 다른 시각을 경험할 수 있다.
비슷한 연령층이 함께 해야 하는 이유도 있다. <파지스쿨>은 왜 20대 전후의 친구들로 시작했을까? 처음 <파지스쿨>을 시작했던 사람들의 직감이었다. 그동안 문탁의 청소년 프로그램을 보자면 17세 미만의 친구들은 주로 부모님에 의해 보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때문에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삶을 만들려면 적어도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17살은 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 다른 이유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친구들의 고민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해서 안정되게 산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신화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들의 고민은 한 가지로 모아진다. 어떤 직업(일)을 가져야 할까, 그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추상적 물음이다. 문탁의 다른 회원들과 뭉쳐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또래들이 함께 공부하고 스스로 구체적인 답을 고민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슷하지만 다양한 연령대가 모였을 때 벌어지는 역동성은 문탁의 활동에서도 드러났다. 그 중 하나가 악어떼 활동이다. 문탁 활동에 점점 심드렁하던 악어떼는 2017년 10대, 20대의 합류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파지스쿨> 졸업생 우현이가 랩퍼 선생님으로, 대학을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아보려고 문탁에 합류한 20대 고은이 댄스선생님으로, 해은/새은/수아가 함께 노는 친구로 합류하면서 악어떼는 활동이자 동아리가 되었다. 지금은 다함께 스케이트보드를 타면서 즐겁게 놀고 있다.
또한 모으려 해도 모이지 않던 20살 전후의 친구들이 젊은 이끔이들이 추진한 ‘길위의인문학’에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다.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보자면 2013년에 형/누나가 청소년들을 만나 멘토가 되어보는 <형아, 어디가?> 프로그램에서 수 십명의 10, 20대들을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연령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서 공부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형이자 누나,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스승이자 동학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3. 2018년 <파지스쿨>은 문을 열 수 있을까
제도로서의 학교에 균열을 내보겠다던 <파지스쿨>은 잘 작동했다고 혹은 이제는 잘 작동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3년에 걸쳐 <파지스쿨>을 졸업한 학생들은 어느 정도 스스로의 삶을 헤쳐갈 힘을 얻은 것 같다. 하지만 <파지스쿨>의 방식은 학교밖 청소년들과 학부모들 모두에게 어필하지 못했다. 청소년들이 <파지스쿨>에서 텍스트를 읽고, 쓰고, 암송하는 것을 조금 경험하기는 했지만, 10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삶을 생산하지 못했다. 이제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좀 더 학교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 아니면 학교태를 조금 더 지워버리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어떻게?
2017년 현재 다양한 경로로 문탁에 접속한 10대들이 여러 세미나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현상을 보면서 한 편에서는 이제 문탁에도 나이에 상관없이 함께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10대가 스스로 세미나를 조직하는 사례도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면적으로 <파지스쿨>을 없앨 때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파지스쿨> 입학을 문의했던 시훈이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현재 시훈이는 <파지스쿨>이 문을 열지 못하자 대신 루쉰액팅스쿨에서 공부하고 있고, 그렇게 문탁에 접속하더니 조금 뒤에는 10대들로만 구성된 ‘학교없는사회’ 세미나에 참여했다. 만약 <파지스쿨>에 다녔다면 지금처럼 지낼 수 있었을까. 해은, 새은, 지혜도 비슷한 경우이다.
일주일에 이틀 4블록의 형태도 이들에게는 너무나 구조화된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10대를 위한 그 어떤 구조화된 프로그램이 문탁에 없었다면 지금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탈학교 혹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지금보다 좀 더 유연하게 다른 배움과 활동에 접속할 수 있고, 다양하지만 비슷한 연령들이 함께 배우면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관계망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배경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2018년 <파지스쿨>은 또 다른 형태로 변해야 할 것 같다. 변화의 원칙은 하나다. 학교태를 좀 더 버리고 최소한의 구조만을 가진다! 먼저 이름부터 바꿔야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스쿨’이라는 말에서 근대의 학교방식을 떠올리고, 2014년 이후 애프터스꼴레가 점점 더 보편화되면서 <파지스쿨>을 그 중 한 가지 형태로 인식하는 것 같다. 2018년 <파지스쿨>은 예전 수유+너머의 ‘케포이필리아Kepoi-philia’ 같은 학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는 이름으로 시작할 수도 있겠다. 4
학교밖 친구들이 일주일에 하루 나와서 공부할 수 있는 1년짜리 장기프로그램-‘청년대중지성(가칭)’-을 구성한다. 10대, 20대 활동의 중심축이라고 할까. 그리고 이외의 강좌, 세미나, 활동, 동아리는 자신이 원하는 경우에 선택해서 할 수 있도록 한다.
주말에는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도 참여할 수 있는 세미나(길위의인문학, 다독, 정독)들이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친구들은 단 하루, 하나의 프로그램에만 참여할 수도 있고, 다른 친구들은 일주일에 3~4일을 나와서 공부하고 자체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방식이라면 상호작용의 최소규모에 대한 우려도 조금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장기프로그램 친구들과 주말 프로그램 친구들이 믹스&매치 방식으로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10대, 20대가 갖고 있는 특이성, 특히나 생산의 경험이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뭔가를 만들어 보고, 실패하고 성공한 경험이 없는 10대, 20대가 앉아서 읽고/쓰기만으로 삶을 살아갈 힘을 기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주명리상으로도 이들은 봄, 여름의 기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들에게는 텍스트와 함께 움직이고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장기프로그램에 접속하는 친구들이 수업의 형태는 아니지만 각자가 1년짜리 (예술프로젝트와 같은) N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좋겠다.
현재 문탁에서 활동하고 있는 10대들을 없는 존재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알아서 잘 적응하겠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10대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함께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파지스쿨>이 이런 구조로 변한다면 문탁의 많은 회원들은 마을교사로서 다양한 세미나와 활동에서 10대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제 <파지스쿨>과 문탁의 활동이 전면적으로 교차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방식은 1차 토론때 제기되었던 마을교사의 폐쇄성에 대한 부분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파지스쿨>의 변신에는 문탁네트워크 전체의 적극적 참여가 필수적이다. 문탁의 회원들은 10대, 20대를 돌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10대, 20대 역시 문탁 회원들을 엄마나 교사가 아니라 동료로 대할 수 있는 배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다른 삶의 실험장이 되고 싶은 <파지스쿨>2.0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변신이 이뤄진다면 모두가 말했던 것처럼 청년들을 위한 별도의 학교, 별도의 교사, 별도의 과정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노라샘이 경험한 두 종류의 여행을 나누고 싶다. 하나는 2016년 3명의 파지스쿨러들을 데리고 떠난 제주 강정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2017년 루쉰액팅스쿨에서 떠난 베이징 여행이다. 강정 여행과 마찬가지로 베이징여행에도 10대들이 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10대의 숫자는 비슷했지만 배치가 달랐기에 노라샘은 베이징 여행에서 그 친구들을 돌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료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강정여행에서 느꼈던 중압감과 달리 즐겁고 가벼운 베이징 여행이 될 수 있었다고한다. 2017년 이전과 이후의 <파지스쿨>의 모습이 바로 이런 차이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2017. 11.18
- 곰도리(이우학교), 정승훈(열일곱인생학교), 한가위(꿈학교), 김경옥(공간 민들레 및 오디세이학교) [본문으로]
- 근대학교의 출발이라고 여겨지는 콜레주는 더 많은 지식이나 교양을 가르치는 것에 있지 않고, 나약하고 순진한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가두어두는 것에 있다.(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지금도 감시, 보호, 관찰, 배려의 명목 아래에 더 촘촘한 관리 체제가 펼쳐지고 있다. [본문으로]
- 2017년 11월 16일(목) 문탁네트워크에서 진행되었던 <학교없는사회>세미나의 파지스쿨러 3기 졸업생 강수아 에세이에서 발췌 [본문으로]
- 케포이필리아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진행했던 청소년/청년을 위한 프로그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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