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
- 기호와 의지 -
니체는 문학이 아니라 음악을 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소리(음악)를 통해서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그의 첫번째 책으로 <비극의 탄생>을 쓴 것, 젊은 시절 바그너에 빠져서 그와 교류하며 바그너가 창조한 음악극을 극찬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니체는 오페라가 아니라 음악극에서 (총체적인 예술로)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보았다.
니체는 많은 책을 썼지만 또한 클래식 작곡을 시도했고, 자신의 책을 가장 음악적인 문학으로 구성했다. 글과 변증법만으로는 소통할 수 없다. 소통하는 척 할 뿐이다. 소통이란 정보의 획득에 있지 않다. 말하는 사람의 의지가 핵심이다. 소통은 지식과 지식의 만남이 아니라 의지와 의지가 만났을 때 가능하다.
왜 글이 아니라 소리일까? 사랑의 세레나데, 노동요, 전투 전후에 불려지는 노래 혹은 구호를 떠올려 보자. 한 사람의 절실함을 보여주는 데 있어 사랑의 노래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마음을 갖고 전투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머리가 아니라 심장을 관통하는 음악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까. 글이 아니라 소리에서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언어를 기호라고 할 때, 소리는 기호이자 동시에 의지이다. 락 콘서트장의 수 많은 사람들이 드럼 소리에 함께 움직이면서 자의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정신을 경험한다. 또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에 의지를 반영한다.
<호모큐라스>에서 고미숙씨가 말한 것처럼 소리는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 박히고 뼈에 새겨진다. 그렇다면 이처럼 심장에 박히는 글, 뼈에 새겨지는 글은 어떻게 가능할까. 글을 읽을 때 그 의지를 읽어내야 하고, 글을 쓸 때 자신의 의지를 새겨넣어야 한다.
읽기는 해석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읽기는 독해讀解여야 한다. 사람들은 오래된 언어 혹은 외국어를 접할 때는 해독의 의지를 갖는다. 하지만 모국어로 대화하고, 모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는 독해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를 읽는다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읽어낸 세상을 만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읽어낸 세상을 혼신을 다해 전하고자 한다. 자신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읽어낼 수 있도록 자신이 경험하고 본 것을 썼다. 셰익스피어의 행위는 바로 번역의 과정이다. 하지만 소통은 번역에서 끝나지 않는다. 읽는 사람의 역번역 과정이 필요하다. 셰익스피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의지를 담아 텍스트를 던졌지만 그것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읽는 사람 역시 동일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가 이 텍스트를 통해서 말 하려고 했던 의지를 읽어내야 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읽는 사람을 스스로가 읽은 것에 대해서 다시 번역해야 한다. 읽는다는 것은 번역과 역번역의 과정이다.
한 사람의 의지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시 말해보자. 언어는 자의적이다. 그것은 정보를 전달해주지만 정보만으로 소통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정보와 정보가 아니라 의지와 의지가 만나야 한다. 기호로 이루어진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기에 실린 의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셰익스피어가 담아낸 의지를 읽어낼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추신. 오로지 음악, 소리만으로 청중과 만났던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보시길……
2017.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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