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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1 노동일은 하루가 아니다 (10장)

by 홍차영차 2016. 4. 15.

1 노동일은 하루가 아니다

- <<자본론>>, 제10장 노동일 -


keywords :  노동일, 부역노동, 농노제, 분minute도둑, 인신매매, 흡혈귀vampire, 공포의 집, 좀비



노동력은 ‘독특한’ 상품이다

우리는 노동력이 다른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만약 노동자가 매일 평균적으로 소비하는 생활수단의 생산에 6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가 자신의 노동력을 매일 생산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6시간(AB)씩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노동일 그 자체의 길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는다.


노동일 I.    A——————B——C

노동일 II.   A——————B————C

노동일 III.  A——————B———————C


이 세개의 선분은 각각 7시간, 9시간, 12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세 개의 서로 다른 노동일을 표시하고 있다. 연장선 BC는 잉여노동의 길이를 표시한다. 1노동일은 AC이고 이는 잉여노동인 BC의 길이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노동일은 불변량이 아니라 가변량이다. 다시 말해 노동일의 두 부분중 AB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지만, 나머지 BC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노동일의 전체 길이는 잉여노동의 길이에 따라 변동한다.

<<자본론>>에서는 반복적으로 “자본가는 노동력을 그 하루의 가치로 구매했다”고 말한다. 자본가에게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그렇기에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런데 바로 앞서 분명 노동일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맑스는 말했다. 노동일의 전체 길이가 가변량이라는 말이다. 1노동일은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루의 가치’를 구매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하루의 가치’를 구매했다면 자본가는 왜 24시간동안 노동시키지 않는가?


<<자본론>> 10장에 노동일에 대한 부분이 나오지만 100페이지나 되는 많은 양의 대부분은 제지, 제철, 제빵공장에서 

노동착취를 당하는 노동자들, 특히 아동,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맑스의 고발이 담겨져 있다.


자본의 공리가 깨지다

자본가가 구매한 1노동일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합계이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산 이유는 분명히 잉여가치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요노동+잉여노동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벌써 상품의 가치 분석이라는 공리가 깨졌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노동력만 잉여노동이 더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1노동일이 고정량이 아니라 가변량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독특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력 이외의 다른 상품들은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이 확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노동력은 그 상품의 소비가 가치의 원천이 되는 상품이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난다. 어디까지를 필요노동이라고 하고, 어디부터를 잉여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더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잉여노동과 필요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서로 융합되어 있어 이를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점. 왜냐하면 부역노동처럼 자기 경작지와 영주의 경작지에서 일하는 것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것을 사용하면 그것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창조된다.”(p308) 다시 말해 동일한 현상(노동력의 소비)이 노동자에게는 노동력의 초과지출이고, 자본가에게는 가치증식이 된다. 둘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잉여노동을 무제한적으로 연장하려는 갈망이 자본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할 때, 이는 거의 불가능한 합의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말한대로 “동등한 권리와 권리”의 충돌이므로 ‘힘의 문제’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가 필요해

너무나 모범적인 귀결처럼 보이지만, 이 둘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통감각의 형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서의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을 위해서도 ‘하나의 계급’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점까지 건널갈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침 6시부터 저녁9시까지의 노동시간을 허가하는 법률은 ‘우리’에게 매우 적합하지만,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로 정한 공장법의 노동시간은 ‘우리’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런던의 벽지공장 지배인 오틀리의 이야기. p329


벽지공장 지배인인 오틀리가 말하는 ‘우리’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자본의 인격으로서 자본가계급 전체만을 말하는 것이고, 자본의 주장에 동의하는 자들을 말할 것이다. 맑스는 1833년, 1844년, 1847년 공장법을 말하면서 표준노동일의 제정이 얼마나 길고 험한 투쟁 속에서 얻어졌는가를 말한다. 투쟁만이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일까. 만약 오틀리가 자본가만이 아니라 노동자를 포함한 우리(!)를 생각할 수 있다면 표준노동일에 대한 화해가 더 쉽게 가능하지 않을까. 자본가와 노동자를 포함한 우리? <<자본론>>을 계속 볼수록 맑스는 우리로 하여금 불타오르는 감정으로 계급투쟁으로 나가라고, 그것밖에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생산과 소비가 함께 이루어지는 꼬뮨이 가능하지 않을까. 푸리에가 제안하고 고댕이 완성했던 파밀리스테르 같은 모델, 현재는 어려운 걸까.


2016. 0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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