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가치는 없다
- <<자본론>>, 7,8,9장 노동과정, 가치증식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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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법을 알고 있는 마술은 마술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2편 화폐에서 자본으로 전환’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상품의 소비과정 그 자체가 가치의 원천이 되는 독특한 상품’을 언급했다. 상품을 소비하면서 가치를 만드러낸다니 이런 상품이 있을까? 뭔가 엄청나게 독특한 상품을 소개하는 것 같지만 마르크스는 그 상품이 ‘노동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잉여가치의 마법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유통에서 ‘관계자외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는 공장으로 눈길을 돌려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자신있게 이곳에서 어떻게 자본이 생산되고 있는가를, 다시 말해 잉여가치의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말한다. 와우!
카드마술의 비밀을 알아챈 관객에게 그것이 더 이상 마술이 아닌 것처럼, 가치증식과정에서 보여준 잉여가치의 비밀은 그다지 폭로될 것도 없는 상식처럼 들린다. 아니 자꾸 마술이라고 우기는 마르크스의 소리를 듣다보니 “사기 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르크스가 1장 상품분석에서 상품에는 사용가치와 가치가 있다고 말했을 때, 그와 함께 놀랄 수 있었다. 구체적 유용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들고 추상노동은 가치를 만든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추상노동은 노동의 보편적인 어떤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필요노동시간’이라는 말에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상품의 소비가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영묘한 상품인 노동력까지! 점점 맑스의 과학적 분석에 토를 달 수 없을뿐 아니라 이제 그의 말이라면 그 어떤 주장도 믿을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비밀이라고 말하는 잉여가치의 생산에 도착해서 뒤돌아보니 앞서 정의했던 전제조건들까지 온통 의심스러워진다. 상품분서부터 다시 살펴봐야하는건가.
우선 마르크스가 폭로하는 잉여가치의 마술비법을 들어보자.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치 증식, 즉 잉여가치가 생겨나는 것은 노동자가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하여 노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결코 노동력의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덧붙여 말한다. 왜냐하면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이 재/생산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이고, 이 정의에 따르면 살아 있는 노동은 매일 매일 다시 살아있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은 1/2노동일이면 충분하다는 뜻. 즉, 노동자에게는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가치지불이 되었다는 말이다. 진짜 그런건가? 분명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분석되었음을 알고 있지만 뭔가 찜찜하고 억울한 기분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깨끗한 착취
다시 상품분석 부분으로 돌아가보자. 노동력 이외의 다른 상품들의 경우-이런 ‘평균’을 가능하게하는 구조에도 그 뒤에 무수한 차이들의 배제를 안고 있지만-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필요노동시간을 평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마르크스도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이 모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사회적/문화적/정치적으로 결정되는 필요노동시간의 합의가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에는 단순한 의식주를 넘어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양쪽이 공감할 수 없는 층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상품분석부터 시작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분석을 따라가다보면 당연하게 충돌이, 계급투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루 노동일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합계이다.”라는 9장의 결론, 이제부터 필요노동, 잉여노동 사이의 “과”는 and 접속사가 아니라 “vs”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결론이 놀라우면서도 무서운 말로 들리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에서부터 잉여가치에 이르는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분석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에 질문하고 있는 것 같다. 털끝만큼의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과학적인 분석으로 노동의 가치를 샅샅히 살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투쟁밖에 없지 않느냐는 역설적인 질문! 다시 말해 가장 이상적인 자본가-착하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와 자본주의 원리를 가지고 한 올의 양심의 가책없이 운영할지라도 자본주의는 그 원리 자체가 본질적으로 타인을 착취하는 구조라고 비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어서 ‘잉여가치율’을 정의하면서 이를 자본/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도라고 부른다. 사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상품분석, 노동자의 탄생, 잉여가치 정의까지 과학적분석처럼 말하고 있지만, 정작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착취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착취가 과학적이라면 깨끗한 것이라면 괜찮은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잉여가치는 없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분석하면서 노동력의 하루 가치를 1/2노동일로 계산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매일 요구되는 생활수단이 1/2노동일이면 될 것이라는 매우 상식적인(?) 가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주의깊게 생각해보자. 어떻게 이런 가정이 가능했을까? 당시 식료품이나 의복, 주거 비용이 낮았기 때문일까? 정말 하루의 반을 일한 댓가로 노동력이 생산/재생산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가정했을까? 판매된 기름의 사용가치가 기름장수에게 속하지 않는 것처럼, 노동력의 사용가치도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서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독특한 상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노동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한다고 한 것은 그 분석대상이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살아있는 사람에게 포함된 능력을 팔아버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설령 그것을 ‘상품을 소비하면서 가치를 생산한다’라고 정의했다고 하더라도 그 잉여가치가 노동력의 소비에서 나온다는 노동자의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조금 더 본질적으로 말해보자. ‘잉여가치’라는 말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착취라는 말의 다른 이름을 잉여가치라는 말로 부르면서 착취가 가능해졌던 것이 아닐까. 단순히 말만 바꾼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잉여가치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분명 가치라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 혹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것도 잉여라는 말로 부를 수 없다. 어디에선가 혹은 누군가가 잉여가치를 말한다면 그것은 착취가 발생했다는 말이고,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다는 말로 들어야 할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그리고 잉여가치도 없다.
2016.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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