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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자본과 생명 (제10장 메모2)

by 홍차영차 2016. 4. 19.

자본과 생명

- <<자본론>>, 제10장 노동일 -


keywords :  노동일, 부역노동, 농노제, 분minute도둑, 인신매매, 흡혈귀vampire, 공포의 집, 좀비



자본은 ‘생명’을 먹고 자란다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대해 비유적으로 노동력을 쥐어 짜서 이윤을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맑스가 <<자본론>> 10장 노동일에서 말하는 ‘노동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남부 주들의 흑인 노동도 생산의 목적이 주로 직접적인 국내 수요의 충족이었던 때에는 온건한 가부장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면화의 수출이 남부주들의 사활을 건 문제로 됨에 따라 흑인에게 과도노동을 시키는 것, 때로는 흑인의 생명을 7년간의 노동으로 소모해버리는 것이 계획적인 수익증대수단으로 되었던 것이다.

(<<자본론>>, 제10장, p311)


자본의 가치증식 욕망은 무제한적이며, 무자비하다. 이는 단순히 자본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자본가가 사회의 구제위원인가, 건강한가, 청빈한가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즉 자본 그 자체의 속성이다.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본은 24시간을 넘어서는 노동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미국의 남부주에 있던 흑인들도 온건한 대접을 받았을 때가 있었다. 이는 노예 주인들이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대접했을 때 ‘인간가축’인 노예들이 죽지 않고 계속적으로 노동력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용에서 보았듯이 무제한적 노동이 필요하고 가능해졌을 때,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무제한적으로 공급될 때, 이러한 온건한 대접은 사라졌다. 이때부터 흑인은 7년간의 무자비한 노동으로 ‘소모’되고, ‘탕진’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에게 새로운 노예를 사는 것이 기존의 노예를 유지하는 것이 비용면에서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들을 좀 다른 이야기가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유명한 여성모자 제조업자 메리 앤 워클리의 죽음은 하루 16시간의 노동, 그리고 사교계절에는 30시간이나 되는 노동시간을 쉬는 시간 없이 일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자본의 가치증식은 노동자의 생명의 단축과 연결되어 있다. 자본의 가치증식은 ‘생명’을 먹고 자란다. 이는 비유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체계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심지어 <좀비 자본주의>라는 제목의 책도 있다! (읽어보지는 못했다.--;;)


흡혈귀와 좀비


자본은 죽은 노동(주어진 일정한 가치)인데, 이 죽은 노동을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더 활기를 띤다. (<<자본론>>,10장, p307)


맑스는 자본과 자본가를 떠올리면서 흡혈귀와 좀비의 이미지를 연결한다. 자본은 흡혈귀vampire가 살아가는 방식처럼 죽은 노동을 살리기 위해서 산 노동을 빨아들일 때에만 잉여가치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잉여가치의 증식에 대해서 자본과 자본가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모습은 좀비가 스스로 물불을 가릴 수 없는 제어불가능성과 흡사하다.

자본의 노동일 확장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영국의 공장법에서 ‘8시간 노동제의 법률 제정’을 제안한 것이 1866년이었는데,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흡혈귀와 좀비와 같은 자본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흡혈귀는 그 속성상 “착취할 수 있는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맑스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동료 노동자라고 말한다. 그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여 자본의 욕망에 대한 확장을 제어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말한다.


계속되는 질문. <<자본>>을 읽어갈수록 맑스는 자본과 노동계급의 투쟁, 권리와 권리의 투쟁을 말하고 있다. 투쟁하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의 길은 없는 것일까? 혹은 노동자와 자본이 각각의 정당한 권리를 극한으로 밀어붙일 때에야 양쪽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뜻인가. 너무 낭만적인가…


2016.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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