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하고 싶니? 제발 너 자신을 먼저 돌보라고
keywords : 알키비아데스, 너 자신을 알라(자기인식), 무지의 무지, 철학하기-자기배려, 앎(tekhne), 자기 기술, 생활철학, 지행합일(知行合一), 소피스트, 공동탐구
최초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직접 민주주의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기소된 이유 중 하나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인데, 소크라테스가 타락시킨 인물로 거론되던 대표적인 이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알키비아데스입니다.
한 마디로 알키비아데스는 지금 우리들이 소망하는 모든 것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훌륭한 가문, 유력한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재산. 현재의 상류층 일원을 상상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인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엄친아계의 엄친아, 알키비아데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의문이 생깁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완벽한 환경을 가진 알키비아데스와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요? 아니, 이렇게 흠 잡을 데 하나 없는 외적 환경을 가진 알키비아데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길래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라는 선고를 내렸을까요?
1.가장 완벽한 자, 알키비아데스에게 필요한 것
완벽남, 알키비아데스
알키비아데스는 아름다운 외모로 이름난 사람이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모를 보고 다가왔고 그와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외모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고 그래서 오만하게 행동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제 아무도 알키비아데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상황-20세의 나이-에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특히 강조합니다. 즉 알키비아데스가 “내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삶을 영위하기보다는 차라리 오늘 죽겠다.”라고 답하는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접근합니다.
알키비아데스의 배경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의 가족은 “아테네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집안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어머니의 조부는 기원전 510년에 아테네에서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운 클레이스테네스였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아테네의 제1시민 페리클레스가 그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알키비아데스는 굉장한 부자였으며, 그의 용모가 수려하다는 것은 만인이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알키비아데스> 초반부를 보면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친분, 가문, 재물을 이용해서 다른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합니다. 즉 그는 정치에 참여하여, 아테네 시민들을 통치하려고 합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신분적 특권을 정치적 활동으로 ‘변환’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목표를 말하는 순간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튼 자네는 자신에게 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네. 너의 정신을 너 자신에게 집중하고 너 자신의 장점들을 의식함으로써 정치 에 참여할 수 있네.” “자네가 마음에 품고 있는 이 모든 일은 나 없이 성취해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세.”라고. 소크라테스의 대답에 알키비아데스는 어리둥절했고, 바로 여기에서 자기배려가 탄생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를 만난 후에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자신만만했던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일에 있어서 저를 도와 줄 사람으로 선생님(소크라테스)보다 더 권위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없다고 전 생각합니다.”(「향연」, 218d) 타고난 재능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어떻게 이런 겸손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가 언급한 훌륭한 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자신을 돌보는 것(자기배려)은 ‘무지의 자각’으로부터 시작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평생 처음으로 재산, 명예, 권력, 가문으로 뒤덮히지 않은 자신의 알몸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알키비아데스는 네온사인처럼 현란한 그의 외적인 환경때문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배려’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를 하겠다고 말했을 때, ‘정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를 통해서 그가 이루려는 ‘화합’이 어떤 것인지 물었지만 그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알키비아데스는 다른 사람이 마련해 놓은 ‘정답’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따랐기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적, 그리스 내부의 적 그리고 그리스의 적을 대면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스파르타인과 페르시아인들을 언급하면서 제왕과 전사가 알키비아데스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그들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의 운명을 짊어질 자격이 없다는 없다는 사실, 적어도 적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설 수 있게 하는 앎(tekhne)이 없음을 증명해 보입니다.
「향연」에 나오는 알키비아데스의 고백은 바로 이런 상황을 통해서 나왔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만난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무지의 무지’에 놓여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외적인 환경을 의지해서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먼저 자신을 돌보는 것, 자신의 영혼을 살피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를 만난 알키비아데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만난 이후에 그를 따르고 그가 권하는 철학과 삶의 방식에 열중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충분히 연마하고 정치에 나서라는 소크라테스의 충고를 끝내 지키지 못하고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정치 입문 초기 가문의 후광과 재능으로 성공하며 전쟁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국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배신 가운데에서 타국에서 살해당하며 삶을 마감했습니다. 「펠레폰네소스전쟁사」에 나오는 투퀴디데스의 말이 그의 인생을 잘 이야기해주는 듯합니다.
“아테네 민중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상식을 넘어선 사생활의 문란함과 무도함, 기회 있을 때마다 행동으로 보여 준 야망의 크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가 독재자가 될 야심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에게 적대적이 되었다. 비록 그가 공적으로는 최고의 장군이었으나 사적으로는 민중들 개개인이 그가 하는 일에 염증을 냈기 때문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아테네의 운명을 맡겼다. 그리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아테네는 패망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6권15장 4절
2.자기배려는 어떻게 가능하지?
자기배려는 생활방식?!
가만히 있어도 출세가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아니 출세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돌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증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배려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산에 틀어박혀 세상과 담을 쌓는 방식으로 아니면 철학서들을 공부하면 가능할까요?
자기배려의 구체적인 실천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알키비아데스>에 나오는 ‘자기배려’ 개념은 그리스 문화의 오래된 금언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스파르타의 금언이었습니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영토가 방대하면서 왜 토지를 경작하지 않는냐?”는 말에 스파르타인들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이는 분명 이론적인 철학이 아닙니다. 영화 <300>의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생각해 봅시다. 스파르타인들은 일평생에 걸쳐서 몸을 단련하는 사람들이었고, 철학이나 이성을 무시하는 축에 속했던 사람들입니다. 즉 스파르타인들에게 자기배려는 ‘생활양식’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를 돌본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 생활의 원리이고, 그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삶(사회/경제/문화)에서 무언가를 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권하고 있는 자기배려는 특별한 무엇이라기 보다는 일상적인 생활방식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고, 또한 자신의 모습을 변화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활양식이자 일상의 원리였다는 자기배려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자기배려는 지식(인식)이 아니라 기술(tekhne)
처음부터 알키비아데스가 원했던 것은 정치가로서 출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이미 가진 것들을 토대로 쉽게 정치인이 될 것으로, 심지어 자신의 후견인이자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만들어온 페리클레스를 능가하는 훌륭한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합니다.
알키비아데스에게 자기배려의 시작점은 ‘무지의 자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지의 무지’를 깨닫는 것은 철학하기의 시작이며, 자기배려의 출발점일 뿐입니다. 자기배려는 자기를 인식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부족한 것이 앎(tekhne)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앎은 많은 지식이나 정보의 획득을 뜻하지 않습니다. 원어를 보면 앎을 tekhne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쉽게 기술(technolog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원리를 알면 더 빨리 익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몸에 각인시키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기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끝없는 ‘자기수련’으로 가능합니다. 1~10nm수준의 오차를 유지해야 하는 비행기 엔진의 실린더 평평도는 사람의 손끝에서 해결됩니다. 기계도 맞추지 못하는 일들을 어떻게 사람이 할 수 있을까요? 수 많은 경험, 실천, 오랜 자기수련의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하는지 자신도 모르지만 그 기술이 몸 안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도의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장인’들만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TV에서 보았듯이 우리 생활에는 이런 기술들이 장착되어 있는 ‘생활의 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알게 모르게 이런 기술들을 실천하고 있고, 또한 ‘자기 기술’을 통해서 자신을 변형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자신의 몸이 건강해지기(변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균형잡힌 식단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 당근이나 김치를 먹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해지는 것은 그저 아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식사에서 한 조각의 김치를 먹을 때, 이렇게 1년, 2년을 지속하는 자기배려를 하게 되면 김치를 먹기 전의 자신과는 다른 ‘자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한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자기배려는 인식이 아니라 기술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동을 포함하는 앎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기배려는 궁극적으로 ‘앎’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바로 앞서 자기배려는 앎이고, 앎은 기술(tekhne)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수련의 기술이 자신을 변형시킨다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자신의 변화는 일련의 행동, 실천들이 행해졌을 때에 가능하다는 뜻이죠. 바로 여기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앎의 확장이 일어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아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 되고, 그가 말하는 앎은 바로 행동의 윤리(도덕)와 깊은 연관을 갖게 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아는 것(인식론)은 행동하는 것(윤리)을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앎과 행동은 일치시켜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삶을 살아보면 엄청나게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 있고, 철학책 한 권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덕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앎(지식)과 행동이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 앎의 의미를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기술을 통한 행위의 변화로, 정도(intensity, degree) 문제로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앎의 강도는 그 앎이 한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켰느냐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기배려는 궁극적으로 앎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어떤 한가지 사실을 ‘알았다’는 방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앎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이는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어떤 곡선이 계속해서 점근선에 다가가는 것과 같습니다. 앎은 자기를 변화시키는 과정이고 결국 자신의 행위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3.삶을 텍스트로 써 내려간 소크라테스
알키비아데스의 자기 배려와 소크라테스의 자기 배려
지금까지 아테네의 엄친아라고 할 수 있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자기 배려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그 자기 배려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확인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알키비아데스가 가졌던 외적 조건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조건들때문에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을 돌보는 것에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알키비아데스는 주변의 부추김과 자신의 빛나는 재능때문에 생활철학으로서 자기배려를 지속하지 못하고 정치에 나가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으니까요.
반면에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경구로 기억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자기 인식이란 그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배려의 다양한 기술을 실천하고 행동하면서 ‘자기’를 만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근본적이면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무지의 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기 인식, 무지의 자각은 그 발견된 ‘자신의 모습’을 재료로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배려하는 사람은 자명한 것에 대해서 언제라도 ‘재조사(공동탐구)’를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새로운 삶을 실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알키비아데스에게 소크라테스가 원했던 삶의 모습 역시 이러했습니다. 귀족이라고, 가문이 좋다고 당연히 정치를 해야한다고 여기지 말라고. 그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배려-철학이란 현재 삶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 자명한 것에 대해서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배려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현재의 삶과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방식의 삶을 제안할 때 바로 철학하기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이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생활철학’이었으며, 교조적인 주장이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를 뜻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급진적인수밖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 자기 배려의 텍스트
소크라테스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가 죽은 지 24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 전체를 ‘텍스트’로 만들어서 아테네인들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소크라테스는 일평생에 걸쳐 생활해 온 원리, 자기배려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재판에서 죽음을 택하면서 살아있는 텍스트로서 자신의 삶을 아테네를 향해 던졌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재물과 명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살아있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강력한 도전이자 문제였습니다.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길을 가겠죠. 나는 죽음을 향해, 여러분은 삶을 향해. 그러나 어느 길이 나은지는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변론>, 42a
자기배려는 알키비아데스 혹은 소크라테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혹은 삶과 동떨어진 특수한 방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것.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멋진 외모, 재산, 가문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면서 자기배려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선망하는 외적인 환경을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었던 알키비아데스에게 필요했던 자기 배려, 사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16. 1. 14(목), 문탁네트워크 겨울 청소년 강좌, <최고의 스승, 공자와 소크라테스>, 뿔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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