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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소크라테스

나는 길 위에서 가르친다

by 홍차영차 2016. 2. 3.

나는 길 위에서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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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옷차림과 맨발의 한 사내가 그리스 최고의 도시 아테네에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문득 한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곤 했는데, 그러다가는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뜬금없이 도덕적인 질문을 마구 던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대답을 하면 그는 계속해서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면서 대화 상대방을 당혹하게 혹은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젊은 크세노폰과의 만남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이런 면모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을 시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크세노폰에게 슬쩍 다가가더니 가재도구 이름을 대며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이어서 ‘용감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 구할수 있느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아고라에서 이렇게 대화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지금으로 보면 명동 한 복판에서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인류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왜 아고라 광장에서, 법정이나 국회가 아니라, 시장바닥이나 길거리에서 철학하기를 시작했을까요?


1.최초의 질문가 혹은 철학자(philo-sophia),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게 된 이유

2류 도시국가에서 아테네 제국으로 :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6세기만 하더라도 아테네는 그리스의 그저 그런 도시국가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를 대표하는 도시는 아테네가 아니라 스파르타였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10년전에 벌어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아테네는 그리스 최고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마라톤, 살라미스 해전은 바로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단지 아테네를 그리스의 대표 도시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전체를 통해서 이전에 한번도 없었던 급진적인 정치체제인 민주주의가 아테네에서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무장 보병을 중심으로 한 팔랑크스 전법은 한 사람의 힘보다는 서로서로의 협력이 중요했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띄웠던 100척이 넘는 전함은 노를 젓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견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죠. 이렇게 시민들의 정치 참여 확대를 통해서 도시국가 아테네와 민주정체는 함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점점 더 성장하는 아테네를 지켜보던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 아테네 이전 그리스의 최고 도시국가는 오랫동안 스파르타였습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내륙에 위치해 있었고, 기름진 농토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테네와 부딪힐 일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제국’으로 변해가는 민주정체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과두정 도시국가들과 계속해서 충돌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더 이상 가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벌어진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의 전쟁이지만,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와 과두정권으로 나눠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싸움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의 가치를 높이 두고 있는 아테네는 계속해서 다른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펼쳤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이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반에 죽은 전사들을 위로하는 추도사에서 페리클레스는 “우리는 헬라스의 학교”라고 말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이룩한 아테네와 민주주의에 대한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첫번째 질문

소크라테스는 도시국가 아테네를 사랑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그는 <변론>에서 그의 평생동안 3번의 전투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포테이다이아 전투, 암피폴리스 그리고 델리온에서 싸우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왜 남의 집 앞마당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전쟁을 하고 있는가? 파르테논 신전과 성벽 그리고 번쩍이는 조각상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 전쟁이 정말 나와 아테네를 더 잘 살도록 (행복한 삶으로) 이끌고 있는가?

   지금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투표’를 통해서 아테네가 ‘결정’했던 일들은 바로 이런 일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한 도시의 남자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가고, 도시 전체를 파괴해 버리자는 결정. 아테네는 누구나가 정치에 참여하고, 모두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자랑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오로지 아테네의 이익만을 위해서 작동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아테네를 향해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젖어들 때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2. 길거리에서 철학하기 - 배움이 일어나는 어느 곳이나 학교

도시국가 아테네와 민주주의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법정이나, 평의회, 민회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화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거리, 시장, 강가, 가죽공방과 같은 아주 일상적인 공간에서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도시국가(polis) 아테네와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파악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의 새로운 도시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세워진 도시였습니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을 치루면서 민주주의를 기본으로하는 아테네 시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대국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군대이자 집행관이었고 법관이었습니다. 즉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은 국가를 위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도시국가 그 자체였습니다. 

도시국가와 시민이 동일시되는 아테네에서 시민들은  직접 민주주의 안에 있지만 국가 혹은 체제에 대한 비판을 자유롭게 행할 수 없었습니다. 도시 국가 아테네에서 자유란 ‘국가의 존속’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할 뿐입니다. 근대에 나온 국가보다 앞선 자유의 권리(天賦人權천부인권)는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바로 ‘자유’라고 할 때 이는 매우 모순되어 보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도시국가 시민이라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의회, 민회, 법정에서의 연설과 같은 공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유로 길바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갔습니다.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도시국가 전체뿐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잘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질문을 던져야했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삶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고안해야만 했습니다.


훌륭한 시민 vs 훌륭한 사람

훌륭한 사람과 훌륭한 시민은 같을까요? 훌륭한 시민이라는 것은 현재의 조직과 제도가 만들어놓은 전통과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시민에게 조직에 대한 반항이나 질문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주어진 법, 규칙을 잘 지키는 것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에게는 항상 ‘자명한 것에 대한 물음’이 존재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지금 이 행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라는 질문.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인들에게 제안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선택했던 전쟁, 그 결과로 얻게 된 재물, 그리고 그 재물로 누리고 있는 문화와 예술이 정말 우리를 잘 살게 해주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해보자(공동탐구)고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04년 30인 참주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정치적인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민주파 인사인 살라미스의 레온을 잡아서 처형시키라는 명령입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과두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명령을 듣기 위해서 출두했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일을 명령하는 것을 듣고서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집으로 간 행동’을 매우 정치적이었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훌륭한 사람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물음을 갖고 ‘불복종한 행위’를 정치적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는 가장 위대하고 지혜와 힘으로 가장 이름난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그대에게 재물은 최대한으로 많아지도록 마음 쓰면서, 또한 명성과 명예에 대해서도 그러면서 슬기와와 진리에 대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혼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변론> 29d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시민들의 국가가 아니라 훌륭한 사람으로 구성된 새로운 도시국가를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재물, 명성, 명예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으로 구성될 때에 아테네가 굳건한 나라로 다시 설 수 있다는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파리로 비유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덩치가 크고 혈통이 좋긴 하지만’ 큰 덩치때문에 움직임이 굼뜬 말에게 쇠파리의 자극이 필요한 것처럼, 자신이 도시국가 아테네에게 이런 자극을 주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고. 이렇게 볼 때 소크라테스가 길거리에서 철학하기를 한 행동은 매우 정치적인 행동이었으며,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것을 보면 그것을 바라본 아테네 사람들 역시 이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 소크라테스의 공부법

새로운 교사의 탄생 - 가장 지혜로운 자?

이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를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친구 카이레폰은 델피 신전에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물음에 여사제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신탁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정치가, 시인, 상인들을 만나서 그들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정치의 화합, 시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대화의 결과 그들은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들이 하는 일과 스스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無知의 無知)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과 소크라테스와의 차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스스로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無知의 知)는 점이었습니다. 


“인간들이여! 그대들 중에서는 이 사람이, 즉 누구든 소크라테스처럼, 지혜와 관련해서는 자신이 진실로 전혀 보잘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이니라.” (<변론>, 23a)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무지의 무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한 후 ‘델피 신탁’을 재해석하게 되고, 그것은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지식과 전통적인 가치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만 하는 사람이 교사라는 개념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극해 스스로 무지를 인정하게 만들고, 진실을 추구할 책임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교사, 스승이었습니다.


말과 글

방금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교사,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크라테스는 평생에 단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글’이 같은 말을 한 없이 되풀이하는 정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글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덕은 지식이다. 하지만 덕은 전달될 수 없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연결됩니다.

덕(arete), 훌륭함이라는 것은 앎을 통해서 가능한데, 그 앎은 남이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깨달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글보다는 말을 자신의 철학적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에게 살아 있는 말은 “배우는 사람의 영혼 속에” 각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강연장, 학교가 아니라 길모퉁이에서 수업을 열었으며, 교과서 대신 상대와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생각을 주고받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서 철학하기를 실천해나갔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낳게 하는 산파술

방금 말했듯이 소크라테스가 선택한 철학하기의 방법은 대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조금 독특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화할 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즉 산파 스스로는 아이를 나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돕는 것처럼, 소크라테스 자신 역시 스스로는 그럴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들을 낳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플라톤 초기 대화편들은 주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어떤 것들을 정의(definition)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들이 경건, 절제, 용기, 올바름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지만 그것에 대한 부족한 부분 혹은 모순에 대해서 말하면서 계속해서 질문을 내립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초기 대화편들은 그 어떤 것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고 마무리됩니다. 즉 사람들을 막다른 골목(aporia)에 다다르게 한 후 함께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하면서 끝이 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헤쳐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앎(episteme)이라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아고라에서 철학하기를 시작한 것은 ‘어떻게 함께 잘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그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도록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잘 살고 있을 때, 모두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이런 질문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혹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힘들고, 재미없고 지루하게만 느껴진다면 바로 지금이 철학하기를 시작할 때입니다. 먼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16. 1. 12(화), 문탁네트워크 겨울청소년강좌, <최고의 스승, 공자와 소크라테스>,  뿔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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