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리스/소크라테스

[그리스철학]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철학자의 삶(1)

by 홍차영차 2014. 7. 15.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철학자의 삶 (1)

-최초의 철학자, 로고스logos[각주:1]의 국가 아테네에서 죽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공식적인 재판절차'를 통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부유한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정이나 잔혹한 독재를 펼치던 참주tyrannos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로고스logos와 민주주의를 찬양하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죽은 것이다.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라고 민주주의를 자랑했던 페리클레스의 말을 떠올린다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더 이해되지 않는다. 단순하게 그 이유를 재판 가운데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답게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아테네에서 철학자의 원형으로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세 가지 논점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기원전 399,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다시 꿈꾸는 아테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파르테논 신전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 수 십 년 동안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의 재판이 399년에야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기적적인 사실로 보인다. 기원전 5세기 초의 상황부터 살펴보자.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 가운데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 이후로 그리스의 첫째가는 폴리스가 되었다. 이후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페르시아의 재침략을 대비한다는 목적으로 델로스동맹을 형성하게 된다. 델로스 동맹에 참가한 도시들은 일정한 수의 배와 병력을 아테네에 제공했는데, 원한다면 그 대신 상응하는 돈을 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사실은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아테네는 200여척이나 되는 함대를 보유했고, 대부분의 동맹국은 배 1척 정도를 부담했다. 그리고 소규모 동맹국들은 대부분 돈으로 납부하는 편을 더 좋아했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동맹의 본부가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겨졌다. 동맹의 금고가 아테네에 있어야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 아테네 제국이라는 인상은 점차적으로 강화되었다. 이런 정치적, 경제적 풍요 속에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지적, 정치적 중심지 뿐 아니라 예술의 중심지로도 만들려고 했다.

   이 시기에 아테네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많은 회화, 조각으로 완벽한 고전미를 만들어 냈고, 철학과 문학에서도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었다. 아이스퀴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고전 비극을 완성했고,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는 역사학을 만들었다. 페리클레스로 대변되는 아테네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것은 없다. 역설적이게도 페리클레스가 우리는 헬라스의 모범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 펠레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의 첫 번째 추도 연설 이후 아테네는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30년 가까운 전쟁을 지속하다가 아테네는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 항복하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의 후원을 입은 과두정이 들어서게 된다. 참극의 시작이었다. 전쟁중이었던 기원전 411년에도 과두정이 잠시 들어서기도 했으나, 이 과두정의 잔혹함은 달랐다. 기원전 404년의 과두정은 30참주로 불리는데, 고작 8~9개월의 지배기간 동안에 1500명의 민주정 관련 시민들을 처참하게 처형했다. 이후 참주정이 무너지고 민주정으로 다시 복귀하지만 아테네인들 마음속에는 씻을 수 없는 아픈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런데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아테네가 패하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여겨지는 시칠리아 원정을 주장했던 사람이 아테네 귀족인 알키비아데스였음을 그리고 이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은 아테네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또한 참혹했던 ‘30인 참주의 지도자 크리티아스[각주:2] 역시 소크라테스의 친구였으며,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여겨졌던 카르미데스[각주:3] 역시 30인 참주 안에 들어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가 충성스러운 시민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민주적 원칙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자였음을 몸소 알고 있었다. 즉 많은 아테네인들이 알키비아데스의 반역 그리고 크리티아스와 동료들의 잔혹함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해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다시 꿈꾸고 있는 아테네인들에게 이런 소크라테스는 결코 간과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2. 훌륭한 사람 vs 훌륭한 시민


자신의 양심을 따라 반역자인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묻어준 안티고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사실 '훌륭한 시민과 훌륭한 사람'과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어오면서 아테네인들은 이 둘 간의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즉 그리스문학의 최고걸작 중 하나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각주:4]는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상황이 비슷하다. 역사 속의 소크라테스와 신화 속의 안티고네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것은 그들이 상충되는 두 가지 의무, 즉 개인의 양심을 따를 의무와 국가에 충성할 의무 사이에서의 갈등이었다. 소크라테스 역시 안티고네와 마찬가지로 둘 중 한 가지 의무를 수행하려면 반드시 나머지 의무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신에게서 받은 소명을 가지고 양심을 지키며 살아온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아테네인들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면 살아가길 원했다. 다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양심과 아테네의 법이 충돌할 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양심을 따라갔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양심에 따라서 자신을 배려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 때 이런 훌륭한 사람들로 구성된 아테네가 더 훌륭한 폴리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극적인 경연장이었다. 그리스 비극이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죽어버렸다고 하지만 <변론>을 보면 극장의 관객들처럼 아테네의 배심원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시민을 상징했다. 그리고 아테네인들은 그리스의 비극 공연처럼 재판을 통해 자신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절차에 직접 참여했다. 즉 아테네인들은 새로운 사상의 극장을 만들어 냈으며, 이 극장은 문화를 가르치는 최고의 도구, 그 자체로 완벽한 민주적 교육과정이 되었다. 장 피에르 베르낭은 그리스 비극이 도시국가와 비범한 개인 사이의 내재적인 긴장을 탐구했다고 보았다. 과거에는 비범한 인물들이 호메로스의 서사시 주인공들처럼 눈에 띄게 두드러지면서 폴리스를 이끌어갔지만, 아테네가 개인을 공동체에 종속시키려고 애쓰던 기원전 5세기에는 개인주의적 영웅의 업적은 도시국가의 조화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겨졌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에게 있어 가족의 죽음을 지키려는 안티고네의 양심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문제였다. 지만 폴리스 아테네의 재건이 필요한 시기에 기존의 전통을 뒤 업는 새로운 생각-시민으로서의 정치 참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양심에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3. 최고의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를 최고의 소피스트로 묘사한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지나칠 수 없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소피스트들이다. 위에서 살펴본 두 가지 논점들은 어쩌면 재판의 부차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재판의 가장 큰 이유는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 중의 소피스트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처음부터 스스로 지혜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소피스트들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철학자혹은 철학하다라는 말이 따로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관념들에 질문을 던지고 사색하는 소크라테스를 사람들이 소피스트로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다른 소피스트들에게 거듭 패배를 안겨주는 모습을 목격한 아테네인들은 그가 최고의 소피스트라고 생각해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며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대신할 확실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은 채 전통적 가치관에 의문을 던지는 그의 태도는 파괴적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펠레폰네소스전쟁 이후의 불안한 시기에 많은 아테네인들은 아테네가 도덕적으로 몰락한 원인을 소피스트들에게서 찾았다. 소크라테스 재판 당시 아테네는 폴리스의 재건을 위해서 전통에 기초한 토대를 튼튼하게 놓을 필요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관념에 도전하는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인들에게 위험한 인물들로 간주되었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 중 한 사람으로 보았는데,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당시 오랫동안 공연되었던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각주:5]에서 찾았다. <구름>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질까봐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모든 것, 즉 기만적인 수사법, 도덕적 상대주의, 위험한 과학적 연구, 무신론 등이 반영되어 있었다. 기원전 423년 초연되었을 때는 소크라테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지만, 이 작품 속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오랜 시간에 걸쳐 아테네인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가 나중에 정치적인 위기가 찾아왔을 때 소크라테스를 위험에 빠뜨렸다. <구름>의 초연 당시 아테네제국은 찬란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로고스logos를 사랑하고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명성을 기꺼이 지키려고 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자신의 철학적인 사명을 공개적으로 열심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끝난 후인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의 상황이 급변했다. 기원전 411년과 404년 각각 일어난 두 번의 과두혁명으로 인해 잠깐 동안 민주체제가 무너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시민들은 모든 가치관과 신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철학자에게 더 이상 관용을 베풀 수 없었다. 19세기의 프랑스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알퐁스 라마르틴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가장 먼저 죽인 사람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당시 아테네가 직면한 역사적 상황, 그리고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는 정서적인 부분을 살펴보니 그의 재판과 죽음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상이 오해받을 만하다고 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정당화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죽고 싶어 했다. 독배를 선택한 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그는 자신에게 선고를 내리도록 아테네에게 강요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소크라테스와 아테네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니체의 말을 들어보면 역사적, 정서적 이유 외에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있는 것 같다.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철학! 소크라테스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어떤 생각을 주장했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또한 어떻게 죽음 이후에 불멸하는 철학자의 원형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계속)

  1. 로고스는 언어, 말이라는 기본적인 뜻부터 이성, 사유, 정신이라는 인간 고유의 정신적 기능과 관련된 개념을 뜻함 [본문으로]
  2. 크리티아스(기원전 460~403)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운 강한 것이 옳은 것이라는 주장을 가지고 삶을 살아왔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여겨졌다. 30인 참주에서도 대표적인 극단주의자로 악명이 높았다. [본문으로]
  3. 크리티아스의 친척이며 플라톤의 외삼촌인 카르미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따라 정치에 입문했으며, 기원전 404년의 과두제 혁명에 참여했다. [본문으로]
  4.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기원전 441년에 완성되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내내 공연되어 소크라테스 재산 당시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 작품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안티고네>는 개인이 양심적으로 국가의 법을 어기는 문제가 소크라테스 시대에 공개적인 논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안티고네는 반역자인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장례식을 금지한 새로운 테베의 왕 크레온의 명령에 반발하며, 신들이 정한 법에 전통적인 가족의 유대가 허용되어 있음을 근거하여 양심에 입각한 불복종을 실천한다. 그녀는 크레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문서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결코 바꿀 수 없는 신과 하늘의 법을 누를 수 있을 만큼 왕의 칙령이 강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인간에 불과하니까요.” 안티고네는 크레온이 신들의 권한을 침해했다고 항의한다. 상반되는 원칙들 사이에서 갈등에 빠진 안티고네는 국가가 아니라 신들(자신의 양심)에 복종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5.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소크라테스가 45살 때인, 기원전 423년에 초연.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돈만 주면 젊은이들에게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소피스트의 원흉으로 풍자하고 있다. 농부 스트렙시아데스는 허영심 많은 아내와 전차 경주와 말에 미친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파산할 지경에 이르러 고민에 빠진다. 그러던 중 소크라테스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 그에게서 채권자들을 따돌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 믿고 아들 페이디피데스를 그의 사색학교(Thinkery)로 보내 비법을 배워오게 한다. 유식해진 아들 덕분에 스트렙시아데스는 이제 채권자들을 따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곧 형세가 반전되어 똑같은 논리로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기 시작하며 어머니마저 치겠다고 위협하자, 스트렙시아데스는 새로운 교육 방법에 넌더리가 나서 소크라데스의 사색학교에 불을 지르고 그의 제자들을 내쫓는다.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