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 -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철학자의 삶 (2)
철학을 공부할 때 우리는 ‘철학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이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주로 각각의 ‘철학(학파)들’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개념이 처음 만들어진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그리스 시대에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스 시대에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특정 선택이었다. 철학이란 개인에게 어떤 특정한 양식으로 살고자하는 실존적 선택권과 연결되어있다. 결과적으로 철학은 무엇보다도 ‘생활양식’이었다. 또한 당시에 생활양식과 철학적 담론은 마치 각기 실천과 이론에 상응하는 듯 양자가 대립하지 않았다. 담론은 청중이나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실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담론은 어떤 철학자가 생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것은, 철학적 담론을 그 자체로 따로 존재할 수 있는 실재들처럼 생각하여 그것들을 개진한 철학자와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담론을 그의 삶이나 죽음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생활양식’으로서의 철학을 살펴보자.
1. 모두가 실천해야 하는 삶 -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신전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신전의 금언 중 하나이다. 이 구절이 소크라테스의 말로 유명해진 이유는 그가 이 구절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 금언은 자신의 신분, 위치를 파악하라는 (겸손의) 의미로 당시의 귀족 중심의 시대를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델포이의 신탁은 소크라테스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금언을 새롭게 해석하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지혜를 가지지 못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지혜란 신의 지혜에 비하면 모두 보잘 것 없으며, 인간에게 가능한 가장 큰 지혜는 무지에 대한 지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신탁의미를 확인한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사명을 시작한다. “신은 나로 하여금 지혜를 사랑하며(철학하며) 또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끊임없이 살피며 살아가도록 지시하였다.”라고 스스로 답하면서.
“그대는 위대하고 지혜와 힘으로 가장 이름난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그대에게 재물은 최대한으로 많아지도록 마음 쓰면서, 또한 명성(doxa)과 명예에 대해서도 그러면서, 슬기(phronesis)와 진리(aletheia)에 대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혼(psyche)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하는 데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변론>, 29d)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 사명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리스 윤리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성찰의 삶을 살면서 권력이나 물질적 부(富) 보다는 미덕과 영혼의 선을 추구해야 불안한 도시국가가 더 우월한 윤리적 기준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아테네인들을 설득하려 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사람의 지적인 본질 및 도덕적인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영혼 개념은 델포이 신전의 금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의 뜻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이제 이 문구는 자신에 대한 위치, 자리를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어떻게 배려해야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영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또한 덕에 대한 민주적인 관념으로 이어졌다. 자기성찰을 통한 윤리적 삶(자기 배려)은 이제 귀족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 하는 삶이 된다. 이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소피스트들이 생각한 것처럼 어떤 앎이나 노하우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바로 <향연>에서 플라톤이 제시했던 ‘철학자philo-shophe(지혜를 갈구하는 인간)’의 정의이기도 하다.
2. 덕(arete)은 지식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관통하는 점은 ‘덕은 지식이다’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덕은 지식이기 때문에 배움을 통해서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인가? 위에서 언급한 ‘너 자신의 알라!’의 새로운 해석을 고려해본다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덕’과 ‘덕은 지식이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호메로스의 영웅들이 주인공이었던 시대에 덕의 일차적인 의미는 용기andreia를 의미했다. 개인의 힘과 용맹이 중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덕의 개념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다른 말로 이제는 영웅의 아레테(arete)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죽공의 아레테, 선장의 아레테가 필요하게 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영혼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 생각했고, 그 영혼의 돌봄이 바로 그 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덕이 일종의 지식이란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논점은 왕양명이 말하는 知行合一로 생각할 수 있다. 1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에게 앎과 행동은 일치시켜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행함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보면 많이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환멸감만 주는 사람이 있고, 철학책 한 권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덕스러운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앎과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 앎의 의미를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정도(degree) 문제로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앎의 강도는 그 앎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얼마나 변화시켰느냐를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즉 소크라테스에게 앎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계속되는 과정이고, 영혼의 변화는 행위의 변화로 나타나게 된다. 2 이런 관점으로 보면 소크라테스가 재판 전체에 걸쳐서 자비를 구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주장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서 그의 철학이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을 부인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3 또한 이 재판은 그에게 아테네 시민들이 영혼을 돌볼 수(자기배려) 있도록 돕기 위한 마지막 대화의 시간이기도 했다. 배심원들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피고에게 틀림없이 화가 났을 것이고, 따라서 신에게 철학적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유죄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산파술 - 자기 배려에 이르는 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은 앎을 전달하는 데에, 즉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질문’하는 데 있었다. 앎과 진리는 완성된 채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인 그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모든 앎은 영혼이 전생에서 지니고 있었던 것에 대한 상기想起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이 같은 관념을 신화적으로 표현했다.
who am i?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상대방은 어떤 한 가지 해답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런 답도 보이지 않는 막다른 길로 인도한다. 다시 말해 앎을 설명하거나 결론지울 수 없다는 불가능성으로 이끈다. 달리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에서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대화상대가 자기 자신을 살피도록 ‘자기에 대한 의식’을 갖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4 그러므로 이것은 소유하고 있노라고 생각되는 명백한 지식을 문제 삼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가치들을 문제 삼는 것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통해서 자기 담론의 모순에 대해, 자신의 내적 모순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진정한 문제는 이것 혹은 저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서 혹은 어떤 방식으로써 존재하느냐이다. 5 소크라테스는 그의 질문과 반어법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 자신의 생활양식,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 이 같은 ‘존재’에의 부름을 실천했다.
<변론>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진 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제시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데모스demos의 힘과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하는 아테네인들이 사실은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는 뜻이된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면 그의 사명을 법적으로 허락하는 꼴이 되어, 소에 붙어있는 쇠파리처럼 계속 비판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소크라테스를 비난한 사람들 중에는 그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겠지만, 그가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 것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죽고 싶어 했다. 독배를 선택한 것은 아테네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그는 자신에게 선고를 내리도록 아테네에게 강요했다.”라고 말한 니체의 말이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시험에 부치지 않는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없다. (<변론>, 38a)
소크라테스의 관심은 도덕성에 대한 이론적/객관적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정말로 구체적으로 행하고자 하는가’를 아는 것이었다. 이 모든 내용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앎이 단번에 얻어질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자기변화는 결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으며 계속적인 앎의 과정을 영속적으로 요구한다.
- 왕양명은 知와 行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知行一致가 아닌 知行合一을 주장 [본문으로]
- <개념-뿌리들>, 이정우, 그린비 참조 [본문으로]
-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말한다. [본문으로]
- 라케스, 29d 하지만 자네는, 진정 개선해야 할 자네의 사유, 자네의 진리, 자네의 영혼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 생각지도 않고 있단 말일세! [본문으로]
- 파이드로스, 278d 여러분이 자신의 ‘소유’보다는 ‘존재’에 마음을 쏟아 스스로를 탁월하게,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만들도록 설득함으로써 특별히 여러분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을 끼칠 수 있을 길에 참여했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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