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3, 4권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광야와 같은 환경에서 한국은 50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동안 압축 성장을 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면서 자랑스러워한다. 60년대 1인당국민소득 100$에서 이제 2만$을 넘어 지금의 정부는 3년 후 4만$을 언급하고 있으니 이정도의 경제 성장을 반세기만에 이룬 나라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면 수백 배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가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얼마 전 치매 부모와 함께 목숨을 끊은 것도 충격이었는데 방금 전 뉴스를 보니 가족 경제의 어려움으로 가족 모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말이다. 기적은 이루었지만 모두의 기쁨을 빼앗아 버린 정치! 어떻게 하면 다시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기쁨을 돌려줄 수 있을까?
국가를 계속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 과연 이런 치밀한 전략을 통한 정치를 통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축의시대」 카렌 암스트롱이 말했듯이 이런 처절함 속에서, 전례 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선배들은 그 상황을 이겨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되새기면서 다시금 플라톤을 읽어보도록 하자.
수호자들을 위한 교육
<국가> 3권에서는 수호자들이 되기 위한 교육으로 언급하는 시가 내용이 2권에 이어서 계속해서 나온다. 이상적인 수호자로서 필요하지 않거나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내용의 삭제와 검열. 죽음과 저승에 대한 공포에서부터 과격한 웃음으로 인한 심리적 변화까지도 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야기에서는 철인왕을 통한 국가 이상주의에 대한 강력한 확신과 함께 골방 할아버지와 같은 시시콜콜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자잘한 것까지 검열이 필요할까 생각되기도 했지만, 이런 논증으로 인해 우리의 사고는 이런 사사로워 보이는 것들을 통해 형성됨을 재확인했다. 특히 치자가 가질 수 있는 거짓말에 대한 특권은 흥미를 더한다. 일반 시민이 치자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환자가 의사에게 거짓말하는 것보다, 또는 체력단련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몸 상태와 관련하여 트레이너에게 거짓말하는 것보다, 또는 선원이 선장에게 허위보고를 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위법으로 본다 라는 말에서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불합리하게 생각되는 시대적 차이(?)를 느꼈다. 역으로 보면 말하지 않아도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있어야 명의가 되고, 명품 트레이너라면 몸만 보아도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시가 내용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형식(모방, 서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 최고의 능력이 발생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궁극적으로 희극이나 비극과 같은 작품들은 필요 없다고 결론을 가져간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노래와 음악을 논의하는데, 노래의 말은 당연히 시가의 내용과 같은 원칙을 따라야 하고, 선법(화성)과 리듬은 말을 따라야 하는 것 역시 기본이 된다.
이제는 체력단력 교육에 대해서 논의하는데, 대체적인 논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시가교육과 다르지 않다. 단순하고 몸과 마음을 해치지 않는 단련의 필요성, 그리고 조화! 토론을 진행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교육이 잘못됐다는 증거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평범한 육체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명색이 자유민으로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도 숙련된 의사와 재판관이 필요하다는 것, 즉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주인이든 재판관이든 남들에게서 정의를 구애햐 한다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언급한다. 비슷한 논조로 목수가 병이 들었을 때를 예를 든다. “누가 그에게 장기 치료를 처방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으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대뜸 자기는 아플 시간이 없으며 본업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간병에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하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런 처방을 내린 의사와 작별하고 몸에 밴 섭생으로 되돌아간다. 그리하여 그는 건강을 되찾고 본업에 종사하든지, 아니면 몸이 너무 허약해져서 생을 마감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걸세.”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교육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누가 우리를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수호자들의 선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국가의 통치자들을 선발하는 것으로 소크라테스는 금을 시험할 때보다 훨씬 더 엄격한 시험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선발된 수호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행복한 특권적 생활이 아니라 시민들보다도 못한 통제된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철학자는 통치자가 되고 싶어 할까
나라의 통치자들로 선발된 사람들이 특권은 고사하고 마치 용병 수비대처럼 시내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서 도시를 지키는 것 밖에 하는 일이 없는데 누가 통치자가 되고 싶어 할까? 이렇게 아데이만토스가 지적하자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설립하고 있는 국가의 목적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지금 선택된 소수의 행복이 아니라 주민 전체의 행복을 확보함으로써 행복한 국가라고 생각되는 것을 만드는 중이라는 것. 즉 시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든다면 그런 나라에서야말로 정의가 실현되어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
그런데 완벽하게 훌륭한 나라, 칼리폴리스에서는 정의만이 아니라 지혜, 용기 그리고 절제도 찾아 볼 수 있음을 확인하고, 이것들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의 특성이 아니라 소수의 통치자들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한다. 그러면서 정의(正義)는 이 나라를 구성하는 세계급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일을 함으로 실현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올바름에 대한 의미 규정을 채택한다. 그렇다면 올바름에 대해서 제대로 정의하기 위해서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확장되었듯이 이제는 국가로부터 규정된 정의가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논의한다. 개인에게도 이와 같은 세 개의 분류가 존재하고 개인도 역시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 안에 세 부분이 각각 남들이 할 일을 제대로 행할 때 자주 독립과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2권에서 제기된 문제 최고로 불의한 사람과 정의로운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더 유익한가라는 문제는 또 다시 다음으로 넘어간다.
여기서는 ‘플라톤의 「국가」와 철인왕의 패러독스’ 1에서 제기한 문제를 함께 논의해보면 좋겠다. 즉 플라톤이 그토록 강조한 철인왕에 의한 국가가 형성되려면 진정한 철학자들이 정치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여기서 쟁점이 생긴다. 시간 및 체력 교육을 통해 완벽하게 양육되고 선발된 뛰어난 사람들(철학자)이 그들의 삶을 버리고 정치적 삶에 들어서려고 할까? 다시 말해 동굴 밖으로 나와서 해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동굴로 들어갈 이유가 있을까? 그것도 진정한 철학자들이 칼리폴리스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소크라테스도 은연중에 인정한 상태에서.
앞에서도 나왔듯이 철학자들로 하여금 정치적 삶에 들어서게 하기 위해서 강제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강제 혹은 강요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사실 미성숙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발된 통치자라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가?
현실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가 생각할 때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정치적인 삶을 고사하고 평안한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처럼 유유자적 한가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과 더러운 현실이 확실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강물로 뛰어드는 것. 무엇이 올바른 선택이 되는 것일까?
2014. 02. 10
- 플라톤의 <국가>와 철인왕의 패러독스, 박성우, 정치사상연구, 제10집 2호, 2004 가을 [본문으로]
'그리스 > 플라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굴의 비유로 바라보는 배움 - 3 (0) | 2014.05.02 |
---|---|
동굴의 비유로 바라보는 배움 - 2 (0) | 2014.05.02 |
동굴의 비유로 바라보는 배움 - 1 (0) | 2014.05.02 |
완벽한 개인, 완벽한 국가! (0) | 2014.02.20 |
플라톤의 국가 1,2권 (0) | 2014.01.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