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철학함 혹은 배움
동굴의 비유는 바로 철학함의 과정이다. 즉 플라톤에게 동굴 안에 갇혀 있는 죄수 상태에서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 그 자체를 보게 되는 과정 모두를 철학함 혹은 배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철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동굴의 비유 첫 번째 단계에서 고개를 돌리는 변화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철학을 할 필요가 있어야 하는데, 일상의 삶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슬을 끊고 몸을 돌리는 과감한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이데거가 말하는 철학의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철학의 정체성은 그의 사유를 끌어가는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이 철학인지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에게 철학은 철학함이고, 철학함이란 ‘사람으로 거기 있음’이다.
우리는 결코 철학의 “밖에” 서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혹시 철학에 대한 어떤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우리는 이미 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자신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이미 철학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철학하지” 않아도 철학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실존하는 한, 언제나 필연적으로 철학한다. 인간으로 거기 있다는 것은 철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은 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철학을 했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본질은 한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1
그런데 삶이 철학이고 철학함이 곧 삶이라면 도대체 새삼스럽게 ‘철학 안으로의 진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인용문이 담긴 책의 제목이 <철학입문>임을 감안하면 그 의도가 더욱 궁금해진다. 우리에게 ‘철학입문’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철학의 ‘밖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철학 안에 있다는 사실 내지 철학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여전히 ‘잠재적인’ 철학자일 뿐이다. 철학입문이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철학을 흔들어 깨우는 것, 철학함에 발동을 거는 것이다. 2 이러한 의미의 철학입문을 하이데거는 철학을 ‘자유롭게 하기’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그렇다면 현실을 인식하고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하는 것, 하이데거의 언어로 다시 질문해 보면 잠자고 있는 철학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연상시키면서 플라톤은 당시의 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배움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당시의 교육관에 따르면 교육이란 선생이 학생의 영혼 속에 지식을 집어넣는 것인데, 소크라테스가 행했던 배움의 방식은 학생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어 올바른 대상을 향하도록 하는 데 있다.(518d) 직적접인 지식의 전달에 집중한 것이 아닌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방법.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내걸었던 두 가지-비은폐성의 인식, 자발적 해방 의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어떤 하나의 기교, 어떤 기술을 통해서 철학함의 상태로 옮겨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무지(無知)에 대한 무지를 깨닫도록 하는 소크라테스의 방법 3이 우리에게 철학함의 유효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5. 자유롭게 질문하기
이제 동굴의 비유에서 가장 설득되지 않았던 동굴로의 귀환을 언급하면서 마무리 하려고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자가 동굴 안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동료에 대한 연민과 의무에 가깝다. 하지만 오늘날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철학을 일깨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동굴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의(定義)하는 철학자의 모습은 현재의 사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는 철학자를 죽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 즉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정의한다. 4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철학자는 더 이상 죽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죽음이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결론은 단지 어느 철학자도 거기에까지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이상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뿐이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형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그가 여전히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철학을 깨우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원적(始原的) 진리로서의 비-은폐성은 단순히 전통적인 빛의 형이상학이 지향하는 밝고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은폐와의 투쟁관계 속에 있는 생기의 사건(Geschehnis)을 의미한다. 5 여기서 진리란 우리 인간이 지속적인 긴장상태 속에서 이미 스스로 도달한 수준을 ‘매 순간 창조적으로 초월할 때’ 비로써 가능할 것이다.
동굴로의 귀환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처음에 질문했던 철학함 혹은 배움이란 자신이 있는 곳에서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아무런 의지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갖고 있지 못하는 현재의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철학할 것인가 혹은 배움의 지름길에 대한 방법론이 아니다. 자기 배려가 이루어지는 각성 순간 혹은 무지에 대한 무지를 깨달을 수 있는 자기 나름의 질문 던지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롭게 질문하기’ 6가 가능할 때 바로 철학함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의 교육 혹은 학교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의 삶은 어쩌면 자신에게 맡겨진 선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입문>, 하이데거, 이기상/김재철 옮김, 까치글방, p15 [본문으로]
- 하이데거에서의 철학과 철학함의 의미, 이유택, 새한철학회 논문집 [본문으로]
- 여러분들 중 몇몇은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비판했던 ‘무지한 스승’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비판했던 것은 ‘바보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로서 사용되는 ‘소크라테스주의’이다. “우리는 지적 질서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라고 주장한 자코토 역시 가르치는 자(가장, 스승) 자신이 먼저 해방되는 것을 ‘보편적 가르침’의 전제 조건으로 보고 있다.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p41 [본문으로]
- 참된 철학자란 항상 죽음을 연습하고 있으며 따라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참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혼적인 상태에서 더욱 가능하고 죽음은 혼과 육체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이돈>. 플라톤, 박종현 옮김 [본문으로]
- 하이데거의 ‘동굴의 비유’ 해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영식, 범한철학 제48집에 나온 하이데거의 <플라톤의 진리론> 재인용 [본문으로]
- 하이데거가 말하는 ‘철학을 자유롭게 하기’는 결국 ‘자유롭게 질문하기’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권위에도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태도. 자신이 근거삼고 있던 그 근거 자체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다면, 그 지점이 바로 철학함 혹은 배움이 일어나는 최초의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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