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며
먼저 동굴 비유에 나오는 첫 번째 변화 과정(1→2단계)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벽면에 비추는 그림자를 진리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돌려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로 하여금 일상을 살펴볼 수 없도록 하는 수많은 장치들에 둘러 쌓여있는 현실을 돌이켜 볼 때, 동굴의 비유에서 지금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과정은 바로 일상적 삶의 마찰력을 넘어서야 가능한 첫 번째 과정이다.
동굴의 비유 첫 단계에서 플라톤은 인간을 한마디로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물의 ‘그림자’이다. 죄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그림자가 다른 어떤 것의 그림자인 줄 모르고 있다. 또한 그는 자기가 보는 그림자야말로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그림자의 원천, 즉 불빛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자를 그림자로서 보지 못한다. 죄수가 죄수인 것은 동굴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존재자)들에 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비은폐성(alētheia)’의 개념을 통해서 살펴보자. 1
진리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로 알레테이아(alētheia)이다. 알레테이아란 말은 a(非)라는 부정어와 lētheia(망각)로 구성되어 있다. 즉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참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은폐된 것으로, 더 이상 은폐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했다. 은폐됨 없이 있는 그것은 그렇기에 은폐되어 있음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따라서 참된 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떤 다른 것, 즉 은폐되어 있음을 더 이상 자체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고 은폐성과의 투쟁으로부터 쟁취해온 것이다. 그리스인에게 진리는 일종의 결핍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진리라는 말이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뜻하고 있다니 기이하지 않은가! 2
하이데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은폐성에 대한 기원을 확증하기 위해서 플라톤 이전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증인으로 데려온다. “자연은 자신을 숨기기를 좋아한다.” 3 이 금언은 숨겨진 채 남아 있으려는 것이 모든 존재자(자연)의 본래적이며 내적인 경향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주변에 놓여 있는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통해서도 진리를 만날 수 있지만 그저 보이는 부분만을 보아서는 그 진리를 볼 수 없다. 그 본질은 발견하기 위해서는 중심으로 가야하고 숨겨진 부분을 찾기 위해 계속된 투쟁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 신체에 유혹된다. 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다. 그 사람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여기서 플라톤이 동굴 안의 죄수들에게도 언제나 이미 빛이 주어져 있다고 보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단지 죄수들만이 이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이러한 무지 속에서 죄수들은 빛으로서의 빛 자체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동굴의 비유 첫 번째 단계에 진리의 본질 물음에 관련하여 이미 어떤 중요한 암시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숨김의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은폐성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의 상태에서도 비은폐성이 존재하지만 결박된 자들은 이러한 비은폐된 것들을 비은폐된 것으로 만나고 있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논거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죄수의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비은폐성에 대한 자기인식 4이 되는 것이다. 그림자를 그림자로 보고, 그림자와 빛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첫 번째 변화 과정이 가능한 전제 조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변화 과정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이 동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쇠사슬로부터의 풀림 그것은 해방의 입문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다른 사람의 강요로 혹은 우연한 사건으로 이루어질 경우 빛으로의 방향전환과 지향은 결코 쉽지 않다. 갑작스럽고 단순한 쇠사슬의 제거만으로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질문을 지속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다. 참된 해방은 해방되는 자 자신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자기의 존재 근거 안에 서게 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5 첫 번째 변화를 겪은 죄수가 이전의 구속 상태로 되돌아가려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의 풀려남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불가피한 것이다. 참된 해방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이란 바로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이 ‘자기 자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3. 햇빛 비추는 곳으로
동굴 비유의 세 번째 단계는 모두 동굴 밖에서 이루어진다. 쇠사슬로부터의 해방이 소극적이고 갑작스러운 해방이었다면, 동굴 밖에서 일어나는 단계는 적극적이지만 느리게 이루어지는 진정한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굴 입구로의 상승은 노동과 긴장을 요구하며 노력과 고통을 예비한다. 여기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성급하게 목표를 달성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빛에 대한 이러한 느린 적응과정을 통하지 않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갑자기 빛 가운데서 뜨게 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망가져버린 눈과 영원한 어둠일 뿐이다. 답답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동굴 밖에 막 나온 이가 활동하기에는 낮보다는 밤이 훨씬 더 낫다. 밤의 어둠 안에서 달빛과 별빛으로 실물들을 볼 수 있게 되고, 점점 더 미명의 밝음에 적응해 나가 드디어 빛에 대한 자유를 획득하여 태양 빛이 가득한 낮에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 하이데거는 동굴 밖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해방 과정은 고통과 수고 이외에도 밝은 빛과 친숙해지기까지 필요한 많은 시간과 단계들을 지겨워하지 않고 참아내는 인내와 용기를 강조한다. 영영 밤의 어둠 속에 갇혀 흐릿한 사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초초해 하는 마음을 이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밤의 정적과 어둠이 무섭다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벽을 기다려야 한다.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한꺼번에 몇 계단씩 오르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6
-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을 시작한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고 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 첫 번째, 동굴의 비유에는 명확하게 “말해진 것들”로서 파이데이아(교육)와 진리와의 관계로서의 본질이 나타나 있는데, 사물들의 모습은 이데아의 드러남 없이는 은폐된 채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동굴의 비유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원래 진리에 대한 그리스어 낱말은 흔히 생각하는 ‘일치’니 ‘올바름’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알레테이아는 ‘비은폐성’을 의미하는 진리 개념에서 ‘올바름’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의 시원적인 본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비은폐성을 탐지, 인지, 사유, 진술들과 같은 플라톤적인 연관 속에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비은폐성을 이데아의 억압 속에 방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동굴의 비유’ 해석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영식, 범한철학 제48집 참조) [본문으로]
- 알레테이아라는 낱말의 형태와 의미구조는 독일어 죄(Schuld)와 짝을 이루고 있는 무죄(Unschuld)라는 표현과 일치되지는 않지만 그것과 상응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p21~22 [본문으로]
- 앞의 책, p24 [본문으로]
- 여기에서 말하는 인식은 자기 수련에 의한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 오직 인식만을 통해서 진실을 만나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가 이루어지기 최초의 각성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해석학>, 푸코, 심세광 옮김, 1982년 1월6일 강의 참조 [본문으로]
- 철학의 학문성과 하이데거, 이유택, 존재론 연구 6집, 257p~283p, 한국하이데거학회, 2001 [본문으로]
-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p48~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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