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치열한 무력을
아름다운 말들의 향연이라고 할까.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보았던 사사키의 이야기가 이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화음 속에서 읽기의 혁명성에 이어 쓰기, 특히 소설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다. 소설의 근원을 경전의 번역, 경전의 주석, 그리고 변명으로 이야기하는 사사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여기 나온 모든 글들은 후쿠시마 사태(2011.3.11)가 일어난 이후의 대담들인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사키는 재난 이후에 일본을 드리우고 있는 종말론과 같은 무기력에 문학을 통해서 대항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나 있다. 말로 이루어진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 읽는 것으로, 쓰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분들은 주의해서 보시길.
말이 태어나는 곳
아사부키, 안도, 사사키는 읽는 것이 곧 혁명이라는 것을 말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주제를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미치지 않을 정도의 읽을 것은 일류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글을 쓸 때에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태워 버려야 한다(얼마나 성대하게 불태우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사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응답으로 글을 쓴다는 아사부키, 타자의 말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타자의 말을 완전히 소화해서 내 말로 바꾼다는 안도까지. 모두가 이해되진 않지만 보고 난 이후에 더욱 가슴에 남는 영화처럼 참 멋들어진다고 느꼈다. 이들의 대화를 현장에서 들은 학생들이 얼마나 매혹되었을까. 아마도 각자가 엄청난 도전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중에 떠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밑바닥부터 각자의 평범한 살아감을 통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담백하게 아무런 겉치레 없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빈사 상태의 웅성거림이 살아나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가 하는 말, 글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앎을 축적할 수 있다고, 말을 ‘축적’가능하다고 여기면서 내 안의 말들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는지. 살아 있던 글들을 죽어 있는 정보로 내 안에 쌓거나 혹은 혹시라도 살아서 ‘나’를 바꿀 가능성의 작은 생명력까지 확실하게 사살해서 내 안에 축적하는 습성으로 생명력 넘치고 변화를 만드는 말/글을 쓰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말과 이미지는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사실은 의식하지 못하면서 던지는 나의 작은 말 한마디, 행동, 입고 있는 옷가지와 먹는 것들 모두가 내가 전달하고자(전달될 수 밖에 없는)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먹고, 입고, 살아가는 것과 다른 것들을 생산해 내는 것은 거짓일수 밖에 없고 실상은 불가능 것. ‘밖’에서 들어오는 말을 정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속고 자기 말에도 속게 되듯,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깊은 우물을 가져야 한다. 세월이 지나도 그치지 않을 계속해서 솟아나는 각자의 우물을 파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몰라도 괜찮아
지금의 문제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읽는 행위가 실천이 되려면 제대로 읽고 아는 것이 필요한데 너무 많이 알아버려서 실천의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더 많이 알기 원하는 ‘권력욕’을 가지고 내가 모르는 것은 시시한 것이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이라는 듯.
어려운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부터의 세계」 서문에 이런 말을 적었다. “그러나 갖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나는 그것을 전달하는 데 이 책 전체보다 더 짧게 쓰는 방법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예술의 역할은 인간이 유용성(효율성)을 이유로 닫아놓은 인식을 열어 지각을 확대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상황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는 하고 있다. 문학, 철학, 예술만 “난해해선 안돼”라는 말을 듣는 것은 부당하다. 이치로의 타격, 메시의 드리블, 페더러의 백핸드를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 모두는 즐기면서 보고 있지 않은가? 모르는 것을 모르는 그대로 놔두면서 “모르니까 재미있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연애의 시작
연애에 정답은 없습니다.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여름의 더운 오후에 샘물을 남김없이 마시듯 내 책을 읽어 달라”는 니체의 말이 제대로 통하려면 우선 목이 말라야 한다. 또한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토너는 주기적으로 물을 마시는데. 신체적으로 갈증이 나지 않더라고 마신다. 그들은 물을 마시는 것이 바로 생명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가리어진 현실을 살아가고 있어 자신이 목이 마른 것인지 아닌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인식 할 수 없도록 맑은 샘물이 아닌 다른 많은 자극들로 우리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언제나처럼 지금이야말로 철학이 필요한 시기인듯하다. 어려워하지 말자. 철학이란 지혜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 치밀하게 고안된 여러 가지 방법들이고, 지혜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일 뿐이다. 물음에 이미 답이 잉태되어 있다면 그것을 끌어내면 되고, 답이 없는 물음이라면 우정으로 함께 하면 된다. 사랑에 관해 다 함께 얘기 나누는 파티를 의미하는 소크라테스의 ‘향연(심포지움)’처럼.
2013.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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