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정신(자기 인식)을 갖게 되면서부터 비로서 인간의 예술적 창조성은 더 반짝거렸을지도 모른다.
객관성으로 무장한 과학의 시대, 근대(Modern)란 한편으로는 주체성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이 시대에 탄생하고 폭발했던 게 아닐까? 200년에 걸쳐 클래식(Classic music)이 번성했고, 종교성을 벗어난 미술들이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자기에 대한 수많은 고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문학에서 타나타고 사라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근대라는 주체성의 시대에 다양한 예술이 꽃피우게 됐을까.
아직은 온 몸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구술성의 문화속에서 미술과 음악은 그저 실용적인 힘으로만 작용했을 것이다. 종교적인 성스러움, 자연의 위대함, 부족의 위대함을 나타내는데 예술은 필수적이었다. 이 시대에는 성스러운 것을 있는 그대로 성스럽게 감각하고 받아들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문자적 세계를 비문자적으로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자문화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세계를 속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무가치한 것이며, 말로 할 수 없는 감정과 무의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비문자적 세계를 보면서 비문자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역량과 일상의 기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무의식으로 인해서 신경증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신체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무의식은 정신적인 불안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너무나 명료하고, 과학으로 분석되지 않는 것이 없는 너무나 명쾌한 세계를 살아가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다. 가정에서는 좋은 엄마고, 일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건강한 것 같은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뭔가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다.
그래서 왜 지금 예술이 필수적인 생존욕구냐고?
지금 예술은 그저 타자의 작품을 바라보고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예술은 문자 문화 속에서 잃어버린 비문자적 세계를, 비문자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감각들을 표현하는 거의 유일한 해방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적인 실험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표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생각만으로 자신의 무의식을 알 수 없다. 어차피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무의식이란 항상 일종의 왜곡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저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쓰다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아니라 손이 글을 쓰고 몸에서 글들이 분출한다. 붓질을 하고 스케치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 흐름이 나타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알아차릴 무언가를 발견한다. 예술은 단순히 멋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수적인 항목이 되었다.
예술이란 별 것 없다. 문자적, 시각적 세계 속에서 비문자적인 세계를 감각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워주는 어떤 것도 예술이 된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예술 작품을 보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그림을 그려보고 만들어보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글을 잘 쓰는가 못쓰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음색이 좋지 않아도, 색을 구분하지 못해도 자신을 표현해보려는 예술적 창조성을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적 창조성이란 말이 기죽을 필요 없다. 지구 역사상 유일한 독특한 개체인 우리 각자는 무의식 속에 각자만의 독특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탈근대의 예술은 구술문화의 예술과 다른 모습일 것이다. 오로지 감각에 취해서 힘(force)으로서의 예술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예술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형식으로 나타알 것이다. 일단 시도하고, 뭔가 실험해봐야 한다. 놀랍게도 실험엔 실패도 성공도 없다. 실험해보고 결과를 가지고 다음 방향을 정하고 또 실험해보는 것. 이게 바로 삶이 아닌가. 몸의 모든 감각 세포를 일깨워서 세계에 나를 열어놓고, 그 어떤 것에도 눈치 보지 않는 해방된 정신으로 세계를 맞이해보자. 이게 바로 예술의 힘이고, 예술=삶이 할 일이다.
고대 민족들에게 음악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류는 의식과 자기 결정을 자신의 권리로 누리게 된 이후 단계에서보다
원시적인 교양 단계에서 훨씬 더 음악의 요소적인 것에 친숙했고 자신을 맡겨 버렸다.
… 하지만 미학자들과 작곡가들은 당시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병적인 심취와 작품에 대한 의식적인 순수 직관을 대비시킨다.
이러한 관조적 청취 형태만이 유일하게 예술적인 진정한 청취 형태이며,
야만인의 거친 정서와 음악 열광자들의 몽상이 이와 대비되어 또 하나의 그룹을 이룬다.
… 감정에 빠지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음악미를 예술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교양이 부족한 청중들이 행하는 일이다.
문외한은 음악에서 가장 많이 ‘느끼고’, 훈련된 예술가는 가장 적게 느낀다.
(에두아르트 한스리크,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143~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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