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2년 계속해서 문학읽기를 하고 있는데 2022년 마지막으로 선택한 사르트르의 <구토>는 뭔가 새롭다. <구토>를 통해서 사르트르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11월은 사르트르의 달이 될 것 같다. 읽고나서 적어놓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 같아서 적어본다.
사르트르라는 이름이 굉장히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는데, 책을 읽다보니 생생한 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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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가들의 세계가 넓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미셸 투르니에, 밀란 쿤데라, 스탕달, 카프카, 마르케스의 한 작품만으로도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세계를 풍부하게 느낄 수 있었고, 그 광대한 세계를 다 이해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장 폴 사르트르는 좀 달랐다.
<구토>라는 작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문학가이면서 철학자이기도 한 그의 위치와 활동 그리고 문학 속에 들어 있는 실존주의적 태도는 그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싶게 만들었다. 실존주의라는 철학이 나에게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문장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편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인간을 결정짓는 그 어떤 선험적 가치나 본질이 없다는 것은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선험적 본성이 없다는 말은 지금의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고,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구성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선택, 행위를 통해서 인간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
사르트르에게 주체성이란 자기 스스로를 미래에 던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과 선택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의 내 모습은 나의 선택과 행위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긍정의 철학이기도 하다. 이 말은 나의 선택에서 악한 것은 없으며 내가 선택한 것은 언제나 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떠오르는 말!
실존주의적 인간은 앞서 만들어진 어떤 기준이나 가치를 진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반대로 가치와 기준을 자신의 행위로 발명하는 존재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다”라는 말이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잘생긴 얼굴이기 때문에, 내가 예민한 기질을 갖고 태어났기때문이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나를 용감하다고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나의 행동, 선택이기 때문이다. 용기있다는 것은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영웅으로 태어났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비겁하다는 것 역시 태생적인, 선험적인 어떤 것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단지 내가 포기하는 행위, 굴복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행동 속에만 희망이 있다는 실존주의! 어쩌면 실존주의는 포스트 모던 시대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며, 인간을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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