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갱신제
: 정여랑, <5년 후>
“결혼 갱신제. 이런 제도가 대한민국에서 시행될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세랑의 소설이 대세인 것 같은데, 이번에 정여랑의 소설 <5년 후>를 읽었다. 아주 짧다. 한 나절이면 다 읽고 남는 분량이다. 내용도 어렵지 않다. 아주 직접적이면서 현실적인 문제이지만,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상을 담고 있다. 결혼 갱신제!
인구 감소가 너무 심해지면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제도가 시행되었다. 결혼할 때 종신제 혹은 갱신제를 선택할 수 있다. 갱신제를 선택할 경우 5년마다 결혼을 지속하겠다는 신청을 다시 해야 한다. 신청이 없을 때 결혼은 지속되지 않는다.
재기발랄한 ‘상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2020년부터 사망인구가 출생인구보다 많아졌다. 벌써 인구 감소 국가가 되었다. 발전도 빨랐는데 쇠퇴 역시 빠르게 일어나는 것 같다. 0명대의 출산율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국가의 ‘현실’이 되었다. “결국 저출생의 위기는 사회 전반의 소수자에 대한 불평등과 그에 따른 갈등을 해소하는 것에 그 해결의 열쇠가 있다.”는 작가의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건 ’20, 30대 여성의 문제’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결코 소수가 아님에도 절대 다수이지 않다(힘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존재나 마음에 정당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계속 갈등하며 살아가거나 혹은 살아가는 것을 멈추기도 하는 경우들”이 지금도 매일 매일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결혼갱신제를 맞이하는 다양한 경우들을 다룬다. 결혼을 코 앞에 둔 남녀, 결혼한 지 5년을 맞이하는 부부, 갱신제 시행 이전에 이혼한 부부, 30년은 함께 살고 이제 다 큰 아이들을 둔 부부, 미성년자이면서 아이를 갖게 된 남녀, 그리고 남자였다가 여자가 된 친구의 이야기까지. 책에서 결혼갱신제를 시행한 국가는 ‘국립인구지원센터’, ‘재생산본부’를 새롭게 만들면서 새로운 일자리는 물론이고 기본소득, 아이의 출산부터 양육, 돌봄까지 책임진다. 고등학생 남녀가 임신한 아이를 낳겠다고 부모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경찰관과 센터의 상담사가 동행하는 장면에서는 한 편으로는 꼭 필요한 모습이라고 생각되면서도 국가가 이렇게까지 간섭하는 나라를 상상하면서 좀 섬뜩하기도.
<5년 후>는 부분적으로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문제를 문학적으로 접근했다기보다 결혼갱신제라는 상상을 통해서 지금의 문제를 아주 실용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조금은 유토피아적이기는 하지만 여기 나온 제도들과 다양한 방식들이 정말 불가능한 이유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에서 가장 가슴 깊이 박혔던 장면은 바로 (아마도) 결혼한 지 30년쯤 된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 있잖아. 결혼 갱신제 신청 서류야. 내가 작성할 부분은 다 채웠어 여기 서명하고 유예기간 지나면 이제 각자의 인생을 살면 좋을 것 같아. 결혼에 매여 있기에는 당신은 내게 너무 과분하고 좋은 사람이야. 정말 고마웠어.”
……
이 개새끼는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하는 중이었다. 눈앞이 하향다 못해 캄캄하게 느껴졌다. 미영은 검붉은 색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몸선을 지닌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남편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너무나 배려심 깊은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내의 이 한 마디에서 그 부부의 일상을 추측할 수 있다. “이 개새끼는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하는 중이었다.” 한 평생 가정을 지키려고, 아이를 지키려고 남편의 폭력까지도 참아냈는데……
문제는 결혼갱신제인가 결혼종신제인가가 아니다. ‘뭣이 중헌지’ 알아야 한다. 결혼한 지 5년이 되가는 부부, 지훈과 선우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함께 마음을 나누고, 함께 성장하고 좀 더 알아가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썩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하나의 사랑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사실은 부르는 이름도 달라질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형태라도 좋은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 (사실 잘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는.... -.-;;;)
남녀노소 누구나 집콕하면서 살짝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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