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 대한 실제적 관찰 기록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92~206쪽
그때 내 머릿속 생각 또한 하나의 요람인 양 여겨져,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도 나 자신은 요람에 깊숙이 파묻혀 있다고 느꼈다. 밖에서 한 물체를 보아도, 그 물체를 보고 있는 의식이 나와 그 물체 사이에 놓이거나 그 물체를 가느다란 정신적인 가두리로 둘러싸고 있어, 나는 결코 직접적으로 그 질료에 가닿을 수 없었다. 152쪽…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 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내 믿음이었고, 또 그 책이 어떤 책이든 간에 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집 쪽으로 1권 153쪽)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또는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어떤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 13)
인간 정신은 외부 물체의 실존이나 현존을 배제하는 변용(affectus)에 의해 변용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외부 물체를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것으로 또는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으로 바라볼 것이다. (<에티카> 2부 정리 17)
비자발적 기억이란 말을 쓰고 있지만 프루스트는 ‘무의식’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산책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에도, 마르셀은 독서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정원에 나가 책을 계속 읽는다. 읽고 싶어하다. 하지만 그의 의식이 온전히 책으로만 가득찬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마르셀(화자)의 의식(혹은 무의식)에는 자신의 가장 깊은 열망(욕망)과 눈이 볼 수 있는 가장 끝에 놓여진 지평선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한 관념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현재 그의 정신을 이끌어가는 것은 책을 보고자 하는 욕망(충동/힘의지)이며, 책 속에서 철학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책 이외의 많은 것들 - 그 날의 습도와 온도, 주변 풍경, 할머니의 이야기, 개들이 짓는 소리 - 이 (무)의식에 있지만, 아마도 마르셀은 책 내용 이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큰 소리가 들렸더라도 현재 그의 신체를 강렬하게 변용시키는 것은 책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말해보자면, 책 이외의 무수한 관념들은 그의 무의식에 있고, 의식되는 것은 그 중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프루스트의 글들이 스피노자 철학의 사례집처럼 보인다. 스피노자에게 인간 정신은 관념의 집합이고, 관념이란 외부 대상와 자신의 신체가 합쳐져서 만든 신체의 변용 및 신체 변용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체에 어느 정도의 '신체 변화'를 생성하지 못한다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외부 대상이 진짜 있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관념이 내 신체에 어떤 이미지를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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