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세부적인 것(사실)에는 여러 면이 있어서 서로 붙어 있는 진실의 조각들 사이에서밖에는 끼어 있지 못하는데도 그녀는 그중 하나를 제멋대로 뽑아내 자기가 꾸며 낸 세부적인 거짓말 사이에 끼워 넣으려 했고, 그 꾸며 낸 세부적인 거짓말이 어떠하든, 거기에는 지나친 면과 채워지지 않는 면이 있기 마련이어서, 바로 이점이 진짜 세부적인 진실이 있을 곳이 그녀가 꾸며 낸 거짓말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했다. (민음사, <스완네 집 쪽으로 2>, p162)
우리는 어떤 대화를 채우는 숱한 몸짓이나 말, 하찮은 사건들 속에서 우리 주의를 끄는 것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들 앞에서는 발길을 멈추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p164
프루스트를 소개하는 많은 책들은 농담반 진담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병에 걸리거나 다리가 부러진' 경우라고 말한다. 읽어내기 힘들만큼 지루하다는 말이다. 한 문장이 페이지의 반을 넘는 경우가 허다하고, 읽다보면 '의식의 흐름'이란 말처럼 아무런 논리 없이 주제를 벗어나기 일쑤다보니 프루스트가 무슨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스완네 집 쪽으로 2>권을 읽다보면 희미하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흐름' 혹은 '의식의 흐름'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 놀라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봉투의 투명한 유리 너머로, 그가 알게 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 없던 사건의 비밀과 더불어 오데트 삶의 일부가 마치 미지의 세계로부터 오려 낸 좁고 빛나는 단면인 듯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러자 그의 질투심에는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생명력이 있어 질투를 부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어치우기라도 하듯, 비록 스완 자신을 희생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질투심은 필요한 양분을 얻었다. 169
하지만 그가 그렇게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의 안정과 평화가 사랑을 위해서는 그리 바람직한 분위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오데트가 더 이상 그에게 있어 항상 부재하고 그리워하는 상상 속 존재가 아닐 때, 그녀에 대한 감정이 소나타 악절로 혼미해진 그 신비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애정이나 감사함이 될 때, 그의 광기와 슬픔을 끝낼 정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때, 그때가 오면 오데트 살므이 모든 행동 그 자체에 흥미를 잃을지도 몰랐다. ... 그는 병 연구를 위해 스스로 균을 접종받은 사람만큼이나 명철하게 자신의 병을 관찰하면서 자신이 치유되면 그때는 오데트가 하는 일에 무관심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병적인 상태에서 그가 죽음만큼이나 두려워한 것은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바로 그 치유였다. 197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인간은 정념에 휩싸인 존재이고, 한 번 정념에 휘둘리면 그 원인을 이성적으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정념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념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더 강력한 정념뿐이라고.
그렇다고 스피노자가 인간의 정념(감정)을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 정념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 조건이라고. 이 점을 인정하고 살아야지 현실에 없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을 모델로 삼는다면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21세기 많은 사람들이 <에티카> 특히 3부인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관하여'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유이다.
바로 앞서 프루스트의 책을 읽기 어렵다고 했지만, 아마도 <에티카>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대부분은 이 책을 읽다가 집어 던지거나 찢어버리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왜냐하면 철학책이 수학적, 기하학적 방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에티카'란 윤리학인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부분부터 출발하여 신의 사랑까지를 기하학적으로 증명한다. 수학문제를 풀 때, '정의definition', '공리axiom', 정리를 바탕으로 풀듯이, <에티카> 역시 정의와 공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증명해 나간다. -.-;;;;;
(<에티카> 3부 정리 37)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매우 과학적인 방식으로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에티카>를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가 왜 이렇게 정념에 휘둘리며 살아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프루스트 이야기에서 왜 계속해서 스피노자를 언급할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마치 <에티카>에서 증명한 정념론, 사랑론을 아주 현상학적으로 보여주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에티카>에도 몇 가지 사례가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사람의 감정이, 즉 정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아주 구체적인 상황과 인물을 통해서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감정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워를 보여주는 '사랑'을 통해서.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사랑, 마르셀과 어머니의 사랑 등등.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는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는 말이 이해된다.
사람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때문에 사실을 확인하고, 논리를 이해한다면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정념이란 아무리 합리적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닐까?
<스완네 집 쪽으로 2>를 읽어내려가다 보니 어디 한 페이지도 그냥 넘어갈 부분이 없는 것 같다. 프루스트 읽기가 더 흥미로워진다. ㅎㅎㅎ
*쓰다보니 위에 인용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 인용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2018.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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