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시대의 ‘인간의 조건’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1장
근대는 노동을 예찬하면서 시작되었고, 모든 사회를 노동 사회로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근대 세계의 모든 인간들은 ‘노동 없는 사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한다. 바로 이 점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노동’에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온 근대 사회는 노동 너머의 활동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해방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사적 삶의 향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왕이 되어도 그들은 자신의 일을 오로지 ‘노동’, ‘직업’의 관점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나카마사 마사키가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의미를 세네카(기원전4~65년), 키케로(기원전 106~ 기원전43)의 글을 다시 소개하고자 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humanitas(인문과학, 인간다움 - 시민으로서의 교양)로 해석하려는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은 자신의 일을 직업적으로 보기보다는 자기 수양의 활동으로 보았다. 그들은 분명 일과 노동이 자연적 생명을 존속시키는데 핵심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또한 그들에게 활동적인 삶이란 그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년)의 <명상록>은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는 당시 ‘세계 전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제국의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직업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과 맺는 관계’의 실천으로서의 활동이었다. 그는 자기와 자신, 자기와 자연, 자기와 세계와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의 핵심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한나 아렌트에게 활동적 삶(vita activa)이 핵심으로 떠오르는 이유이다. “우리가 활동적일 때, 우리가 진정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아렌트의 질문은 ‘활동적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혹은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뀔 수 있다. 왜냐하면 아렌트에게 ‘행위란 사물이나 물질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인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인간이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의 근대적 번역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렌트는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으로서 고통과 힘듦을 수반하는 ‘노동’과 인간 실존에 있어서 비자연적이지만 영속성의 사물을 만드는 활동인 ‘작업’은 모두 ‘행위’를 통해서만 정치적인 활동, 활동적 삶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지구라는 제약 속에 던져진 인간
인간은 계속해서 지구 위에서 태어나고 죽어간다. 하지만 인간은 주어진 자연 조건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갈 조건을 형성한다. 분명 지구라는 제반 조건은 인간의 삶을 한정짓는 제약이지만, 다른 한 편에서 자연과 사물들은 인간실존을 조건짓는 제약이기에 비-세계, 물질 덩어리가 아닌 세계로서 인간과 연관지어 생각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지만, 이들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전제들이 있다. 탄생성과 사멸성이다. 영원하게 존재하는 우주와 자연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다른 많은 철학 속에서 논의되었다. 그리스 시대 인간의 필멸성은 죽지 않는 신과 달리 고귀한 행위에 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으로 여러 철학자들에에 논의되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필멸성보다는 탄생성에 더욱 주목하는 것 같다.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맨몸의 인간이 살아가기에 자연 조건은 참 막막하다. 하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는 자연 속에 인위적인 사물들을 구성한다. 즉, 지금과 다른, ‘이방인으로 세계에 태어난 새로운 손님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마련하고 보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구성이 가능한 것은 ‘어떤 누구도 지금껏 살아왔던 누구와도 같지 않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다’는 다원성/다수성의 조건 때문이다.
자유인의 삶
아렌트가 말하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동적 인간과 상당히 비슷해보인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능동적 인간은 자연의 필연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조건을 잘 인식하고 그것의 작동 방식을 필연성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스피노자적 인간은 이 필연성의 법칙을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내재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아렌트가 소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자유인의 삶은 이와 상당히 닮아 있다. 자기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생물학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거나 주어진 조건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자(사물-사람)과 일시적이지만 어떤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 다만 이러한 필연성을 자기 밖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에 예속되어 있다면 이는 노예적 삶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먹고 살기 위한 행위로서의 노동이나 장인의 탐욕적 삶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인의 삶과 노예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폭군의 삶이다. 폭군은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는 노예의 삶이고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젼혀 사유하지 않는 노예일 뿐이다.
아렌트는 고대 폴리스에서 자유롭고 정치적인 형식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정신과 관조의 능력을 신체와 대비해 우월하게 느끼는 사회를 살고 있다. 또한 그는 여성이면서 유태인이라는 이중적 타자성 속에서 전체주의의 시대를 몸소 경험했다. 그렇기에 그는 사유없음과 정치적 행위로서의 실천을 근본적 주제로 삼았다. 다만 그는 사유없음의 문제를 정신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활동 - 노동, 작업, 행위라는 구체적인 구분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사유와 실천을 앞서가는 시대에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사유할 수 없는 영역이 발견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활동 - 행위 하나 하나를 기술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는 것이 더 필요할 것 같다. 1957년 스푸트니크호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주 진출이라는 욕망,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긍정과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우리 모두를 품었던 어머니 지구의 붕괴를 염려하게 만들었다. 아렌트의 말대로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하는 기술, 지구를 한 방에 없앨 수 있는 핵폭탄, 지구의 모든 인간이 한 가지만 보고 생각하도록 만든 인터넷와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는 지금 기술의 진보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환경으로 자신들을 점점 더 몰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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