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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스피노자 개념 발명1 - 속성

by 홍차영차 2019. 10. 4.

스피노자 개념 발명 1 - 속성

: <에티카> 1부





철학은 개념의 발명

질 들뢰즈(1925~1995)는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에서 ‘철학의 쓸모’를 묻는다. 그가 국가 박사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을 출판한 것이 1968년이고,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천개의 고원>이 1980년에 쓰여졌음을 고려한다면 말년의 시기에 좀 생뚱맞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노년에 들어서 철학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 것일까? 하지만, 고리타분할 것 같은 제목의 책에서 그는 철학의 고유한 임무란 “개념들을 형성하고, 창안하고, 만드는 기술”이며, 이는 또한 아주 구체적인 ‘질문의 발견’과 연결되어 있음을 도전적으로 상기시킨다.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정의에 비춰보면, 스피노자는 일평생을 철학적으로 살아온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은 ‘개념들의 발명’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스스로가 발명한 개념들 - 신, 속성, 공통개념, 평행론, 감정역학, 신의 사랑 등등 - 로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 스피노자의 삶과 철학은 고대로부터 철학이란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양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논증한 피에르 아도의 말에도 잘 부합하는 것 같다.(<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윤리학은 왜 신으로부터 출발하는가

스피노자는 <에티카>라는 제목의 책을 쓰면서 1부를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증명으로 시작한다. 어째서 윤리학이 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했을까? 스피노자의 접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초반 유럽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후의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영토전쟁이라 불리는 30년 전쟁(1618~1648)을 거치면서 유럽 전역은 피로 물들었다. 사랑과 평화를 말하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차이라는 명목적 이유 때문에 최소 수백만에서 수천만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보다 오랜 기간 전쟁이 지속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30년 전쟁’은 한 해도 전투가 멈췄적 적이 없었고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전쟁이 펼쳐졌을 정도로 참혹했다. (<30년 전쟁>, 웨지우드)

17세기 내내 수많은 전쟁으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죽어갔고, 스피노자가 1672년에 네덜란드 공화주의자인 얀 더 빗을 찢어 죽인 대중에 맞서 “야만의 극치”라는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가려고 했다. 스피노자(1632~1677)가 태어나서 맞이한 세상은 이런 상태였다. 스피노자에게는 초월적인 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전제되는 신, 오로지 사제들을 통해서만 계시받을 수 있다는 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스피노자에게 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은 그 무엇보다 절박한 앎이었다.


실체, 속성, 본질

<에티카> 1부에서 다루고 있는 실체와 양태, 즉 신과 세상 만물의 문제는 스피노자에게는 결코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맞닥뜨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문제였으며, 현실의 구체적인 행동들과 마주침들을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추춧돌이었다.

중세로부터 신은 항상 초월적 신이었고, 인간과 유사하지만(?) 결코 같은 평면에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사실 이 유사하다는 것이 가장 문제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신의 탁월한 지성과를 유비적이지만 결코 같지 않으며, 신이 인간을 자신과 유사한 모습으로 창조했지만 존재방식에서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면에서 무한하지만, 인간은 거의 모든 점에서 유한하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의 지성과 신의 지성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신과 만물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설정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그가 내려주는 계시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 계시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사제(특별할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이후의 일들은 뻔하게 예상 가능하다. 결코 알 수 없는 계시이기에 사제만이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이후 종교는 왕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데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게 되었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은 생각을 확 바꾸어버린다. 신과 만물이 한 평면 위에 놓여져 있다고 말한다. 무한한 신과 유한한 인간/동물/사물은 그리 다르지 않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놀라운 주장! 그런데, 어떻게 무한한 실체인 신이 유한한 양태인 인간과 연결될 수 있을까? 실체, 속성, 양태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곧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재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실체로 이해한다. (1부 정의 3)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1부 정의 4)

나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을 양태로 이해한다. (1부 정의 5)


<에티카> 1부에서 스피노자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개념은 바로 속성이다. 철학이 개념(concept)의 발명이라고 했는데, 개념concept는 곧 임신conception과 다르지 않다. 하나의 개념을 발명해내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임신하여 출산하는 과정과 다름 아니다. 그 개념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조심해야하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실체는 속성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속성이란 곧 “실체의 본질”(1부 정의 4)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규정하는 본질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보면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본질이란 “그것이 주어지면 그 실재가 필연적으로 정립되고, 그것이 제거되면 실재도 필연적으로 제거되는 것”, 또는 “그것이 없이는 실재가, 역으로 실재가 없으면 그것이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것”(2부 정의 2)이라고 말한다. 이런 규정을 따라가 보면, 실체가 없으면 속성도 없고, 속성이 없으면 실체도 없다. 스피노자는 통념적으로 말하는 본질 규정에 ‘사물이 없으면 본질도 없다’는 규정을 추가한다. 즉, 실체와 실체의 본질(속성)간에는 어떠한 위계도 없고, 상호간에 어떠한 선재성도 없다는 말이다. 실체 밑에 속성이 있고, 속성 밑에 양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인 실체와 무한하게 많은 속성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곧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를 신으로 이해한다. (1부 정의 6)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1부 정의 11)


1부 정리 1 ~ 정리 15는 우주 안에는 단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곧 유일, 무한,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신, 즉 자연’을 증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하나의 실체와 무한하게 많은 속성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분명히 다른데 어떻게 이것들이 모여서 유일 실체를 구성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적 구별과 다른 실재적 구별을 도입한다. 한 마디로, 무한한 속성들간의 구별은 실재적 구별이라는 것이다. 컵을 떠올려보자. 컵에는 모양, 무게, 색깔, 밀도와 같은 다양한 특성들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 특성들은 하나의 컵을 이룬다. 속성들간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이고, 이렇게 질적인 차이를 말하는 실재적 구별에는 수적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즉, 실체는 결코 (수적으로) 분할될 수 없으며,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간에 실재적으로만 구별된다. 실체의 분할 불가능성!

신이라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무한한 속성들로만 표현된다. 연장속성으로, 사유속성으로. 삼각형이라는 사물(연장)도 삼각형이라는 관념도 사실한 동일한 것(신)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동일한 자연을 연장 속성에서 표현하느냐, 사유 속성에서 표현하느냐에 따라 서로 질적으로 구분될 뿐, 자연 자체는 사실상 동일한 하나이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 하나뿐이며 다른 모든 실체적 속성들은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질적인 특성들이 된다. 


속성과 양태 - 무한과 유한

스피노자의 본질 규정을 속성과 양태에도 적용해보자. 실체가 없으면 속성은 없고, 속성이 없으면 실체가 없다. 동일한 방식에서 속성이 없으면 양태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양태가 없다고 해서 속성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라는 인간이 죽었다고 해서,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속성은 실체의 본질이지만 양태의 본질은 아니다. 즉, 실체와 양태 사이에 본질에 있어서의 공통점은 없다. 실체가 무한하다면 양태는 유한한 존재라는 본질적 차이만 도드라진다.

그런데, 이렇게 상호 공통점이 없다면 어떻게 신이 양태를 창조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못한 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1부 공리 5)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실체와 속성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속성에 있다.

실체와 양태 사이에 본질상의 공통점은 없지만, 속성상의 공통성은 있다. 신은 자신의 속성들을 양태들로 펼치고, 양태들은 자신 속에 속성들을 함축한다. 신, 즉 자연으로 불리는 스피노자의 실체는 자신이 창조한 양태들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런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신은 속성을 통해서 자신을 양태들로 표현하고, 표현해야만 한다. 좀 더 강하게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세계에서 양태들로 표현되지 않는 실체란 존재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스피노자의 “신은 모든 사물들의 내재적 원인”(1부 정리18)으로 존재한다. “만일 깊이 숨겨진 이론으로서의 이 방법에 끝내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면 거기서 위대한 일의성의 전통이 어렵지 않게 확인될 것이다.”(<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부,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그렇다고 속성의 공통석으로 실체와 양태가 연결되었지만, 속성과 양태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 유 안에서 무한한 속성은 어떻게 유한한 양태와 연결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간략하게 짚보자면,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양태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태어났다 죽기도 하면서 변화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연장 속성 측면에서 보면 세상 모든 양태들은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통해서 그 모습을 형성하고, 사유 속성에서 보면 세상 만물들은 ‘무한 지성’ 속에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이를 무한 양태라고 부르는데, 이를 통해서 속성의 무한성과 양태의 유한성을 이어준다. (무한 양태라는 말이 좀 애매하긴 하다. 그렇지만, 실체, 속성, 양태를 이어주는데 있어서 속성이 어떤 방식으로 그 셋을 이어주는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


일자(一者)와 다양성

실체와 양태가 속성을 통해서 연결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세상의 만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신 안에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세상 만물들인 양태는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속성들의 변용이다. 그렇다면 실체인 신과 양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양태들을 통해서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스피노자의 이 논리를 좀 더 펼쳐보면, 신, 인간, 강아지, 풀과 돌은 속성상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놀라운 발상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신 앞에 서서 신을 바라볼 수 있고 신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감을 주는 신은 사라진다. 우리는 속성에 기대어 신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양태들은 신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다. (1부 정리 15)


실체와 양태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세상 만물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은 초월적 신이 우주에서 지구의 만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체와 양태를 이어주는 속성은 양태속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양태는 실체의 본질인 속성의 변용으로서 신 안에 존재하고, 신의 모든 양태는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들을 감싸면서 존재한다. 한 마디로, 양태는 속성을 함축(involve)하면서 동시에 전개(develop)한다. 이제 우리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 속성, 양태를 가로지르는 일의성(一義性), 모든 양태 속에 존재하는 내재성(內在性, intrinsic)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에티카>, 스피노자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질 들뢰즈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이수영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진태원


2019.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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